내일이 "삼일절" 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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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의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단결을 굳게 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함양하기 위해 제정된 기념일. 4대국경일의 하나로 매년 3월 1일이다.
1919년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우리민족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에 항거함과 동시에, 전세계에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총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 숭고한 자주독립정신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하여 정부는 1949년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하여 이날을 국경일로 정하였다. 이날은 3부 요인을 비롯해서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모여 기념식을 거행하고, 조국광복을 위해 싸우다 순국한 선열의 유족 및 애국운동가들로 구성된 광복회 회원들은 별도로 파고다공원에 모여 그날의 뜻을 되새기는 의식을 거행한다.
또한, 정부에서는 광복회 회원들에게 3일간 철도, 시내버스, 수도권전철 등에 대한 무임승차의 편의를 제공하고, 전국의 고궁 및 공원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도록 하며, 일반가정은 전국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여 그날의 의의를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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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독립선언서 (三一獨立宣言書)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이 한국의 독립을 선언한 글.
역사적 배경
삼일독립선언서
1918년 초반부터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세계적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고 1919년 1월 18일에 파리 강화회의가 열리자, 당시 식민지·반식민지 상태에 있던 여러 나라에서는 독립할 수 있다는 기대가 크게 일어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상하이[上海]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에 의해 2월 1일 김규식이 파리 강화회의에 급히 파견되었고, 2월 8일에는 일본유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더구나 1월 21일 고종이 죽자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유포되면서 그동안 폭압적인 일제의 무단정치에 대한 민중의 분노가 더욱 높아졌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의 천도교·기독교·불교의 지도자들은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되었다.
작성 경위와 내용
이들의 첫 움직임은 1월 20일경부터 손병희·오세창·최린·권동진 등의 천도교측 중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1월중 2차례의 모임에서 처음에는 손병희의 발의에 의해 일본정부에 건의서를 내기로 했고, 2번째 모임에서는 독립청원서와 선언서를 동시에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2월 상순경에 천도교측은 대한제국의 거물관료였던 윤용구·한규설·윤치호·김윤식 등과 접촉하여 그들을 독립청원의 대표로 내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거부했고, 김윤식은 청원서만 내는 것을 고집하고 독립선언서의 발표에는 찬성하지 않음으로써 이 계획은 무위로 돌아갔다. 2월 중순경에 최린은 최남선의 주선으로 기독교측과 연락이 닿아 기독교측의 대표격인 함태영(咸台永)과 만났는데 그가 청원서만 내겠다고 하여 천도교와 기독교측의 회동이 결렬될 뻔했으나, 결국 선언서 발표에 동의하게 되었다. 또한 한용운(韓龍雲)을 통해 불교측과의 제휴도 이루어져 독립선언서가 작성·발표되었다. 이때 독립선언서의 작성을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은 최린이었는데, 그는 "청원서나 건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으므로 대내적으로 전국민을 분기시키고 대외적으로 전세계를 향하여 독립해야 하는 이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는 중대한 선언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최린은 이미 2월 상순에 선언서·의견서·청원서 등 운동관계 서류의 초안을 최남선에게 기초하도록 부탁했는데, 손병희 등과 합의한, 첫째, 평화적이고 온건(穩健)하여 감정에 흐르지 말 것, 둘째, 동양의 평화를 위하여 조선의 독립이 절대 필요함을 강조할 것, 셋째,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이 전통정신에 입각한 정의와 인도의 운동임을 강조할 것을 기본내용으로 삼게 했다. 삼일독립선언서의 전체정신은 첫째, 한민족의 독립정신 및 그 유래를 철두철미 민족 고유의 양심과 기능에서 발동하도록 하고, 둘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결코 배타심 특히 단순한 배일정신에서 온 것이 아니라 민족의 생존발전상 당연한 지위를 요구하는 것임을 명백히 하고, 셋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한국인 독자의 이기적인 동기에서가 아니고 동양 전체의 평화 및 세계 역사의 추세에 비추어 불가분한 것으로 타당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며, 넷째, 한국인의 독립운동은 일시적인 감정이 아니고, 그 목적을 완수하기까지 어디까지나 지속할 성질이라는 것을 명백히 할 것 등이었다. 더욱이 이 선언서의 내용은 근대의 서구사상인 자유·평등·인권·도의 사상을 반영하여 우리 민족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온 문화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침략에 대결하여 정의와 인도에 입각하여 민족의 자유·독립·평등을 요구한 것이었다. 나아가서 한국의 독립이 동양의 평화, 세계의 평화,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고, 세계개조의 대기운과 도의시대를 강조한 것은 외세에 의지하거나 타력에 의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뜻이 아니고 세계정세도 바야흐로 유리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으며, 비폭력을 주장한 것은 일제와의 타협이나 청원적인 내용이 아니고 오히려 비폭력을 호소하면서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요구인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정정당당하게 끝까지 투쟁할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배포와 의의
삼일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 불교측 2명 등 33인이 민족대표로 서명한 후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에서 2만 1,000매가 인쇄되어 2월 28일부터 전국 각지로 전달·배포되었다. 1,762자로 된 독립선언서는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 33인이 선언문의 낭독 없이 한용운의 간단한 취지설명 후 축배를 들고 일본 경찰에 자수함으로써 민족대표에 의해 민중 앞에서 낭독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삼일독립선언서의 전국적인 배포와 전달은 운동의 조직과 준비를 함께 이루어지게 함으로써 각지의 3·1운동의 전개에 있어 커다란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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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밑에 글에도 있었지만,
내일의 3.1절은 그냥 노는날로 이제는 인식되어 갑니다.
3.1절에 전국을 휘감았던 태극기는, 스포츠경기에서만 활용되는
응원용고무튜브(?) 비스무리해졌고,
애국가는 급기하 응원가로 재편성되었군여(이거는 아직 말도 많지만..)
저두 이제 나이가 들어가나봅니다.
이런 생각을 하나보니..
예전엔 당연하게 여기며 넘어가던일이 이제는 좀 생각해보게 되는군여.
ㅋㅋ.. 사실 봄에 꽃피는 것도 이제는 신기합니다..
당연함에서 신기함으로 바뀌는게 저뿐인지..
낮에 잠깐 3.1절 스크랩을 해둔걸 올려보면서..
이제 퇴근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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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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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세 만세
만세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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