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이틀전 한글날이었죠..훈민정음 뜻아시는분..?
- [경]베어
- 조회 수 606
- 2009.10.11. 22:18
||0||0서울 간송미술관에 있는 훈민정음 책.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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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한글이 창제·반포되었을 당시의 공식 명칭, 또는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말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한때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 등으로 낯춰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글'이라고 한다. 문자체계의 특징은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면서 음절단위로 적는 음절문자의 성격을 함께 지닌 점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으나, 그중 초성의 ',,ㅿ'과 중성의 ''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그밖에 28자를 이용한 병서(竝書)·연서(連書) 문자가 쓰였으며, 성조를 표시하는 방점이 쓰였다.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내 이 爲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노니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미니라"라는 서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함께 새 글자 창제의 바탕을 이룬 정신이 나타나 있다. 즉 첫째 우리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민족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제과정은 조선시대의 일종의 연구소인 집현전의 학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지속적으로 세종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이었던 중국 운학(韻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중국 운학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로서 그 주된 목적은 운서편찬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 운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문적 경향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었고, 그것이 국어의 표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어진 결과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세종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의문나는 점을 물었고,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랴오둥[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세종은 3년간의 보충연구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소개하는 책 이름을 글자 이름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여 판각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이한걸(李漢杰)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한문본, 〈훈민정음〉원본이라고 한다. 목판본 1책 33장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 : 네 테두리가 2줄로 됨)에 유계(有界 : 책의 행간에 경계선이 있음)이고, 소흑구(小黑口 : 책의 중간인 판심의 위아래에 가느다란 검은 줄이 있음)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책의 처음 2장이 빠진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을 때 실수하여 '세종어제서문'의 끝자인 '耳'자가 '矣'자로 바뀐 듯하다(〈세종실록〉에는 '耳'자로 기록됨). 이밖에 주해본 〈훈민정음〉으로는 희방사본(喜方寺本)·박씨본과 일본의 궁내성본(宮內省本)·가나자와본[金澤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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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http://cafe.daum.net/taostory/1ibJ/5623
시간나시는분들 한번씩 읽어보시면 좋을듯합니다.
이 책은 조선 세종 28년(1446)에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왕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한문해설서이다. 책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해례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또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구성을 보면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의 본문을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를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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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한글이 창제·반포되었을 당시의 공식 명칭, 또는 훈민정음을 해설한 책.
1443년(세종 25년) 완성되어 1446년 음력 9월 상순(양력 10월 상순)에 반포된 훈민정음의 말뜻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이다. 한때 언문(諺文)·언서(諺書)·반절(反切)·암클 등으로 낯춰 불리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는 '한글'이라고 한다. 문자체계의 특징은 한 음절을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는 음소문자(音素文字)이면서 음절단위로 적는 음절문자의 성격을 함께 지닌 점이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문자체계는 초성 17자, 중성 11자로 모두 28자였으나, 그중 초성의 ',,ㅿ'과 중성의 ''가 폐기되어, 오늘날에는 24자만 쓰인다. 그밖에 28자를 이용한 병서(竝書)·연서(連書) 문자가 쓰였으며, 성조를 표시하는 방점이 쓰였다.
〈훈민정음〉 서문은 다음과 같다. "나랏말미 中國에 달아 文字와로 서르 디 아니 이런 젼로 어린 百姓이 니르고져 배 이셔도 내 제 뜻을 시러 펴디 몯 노미 하니라 내 이 爲야 어엿비 너겨 새로 스믈여듧 字를 노니 사마다 수 니겨 날로 메 便安킈 고져 미니라"라는 서문에는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든 목적과 함께 새 글자 창제의 바탕을 이룬 정신이 나타나 있다. 즉 첫째 우리가 중국 글자를 빌려서 우리말을 적고 있으나 이는 중국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이므로 우리말을 적는 데 맞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우리말을 적는 데 맞는 글자를 만들기 위해 새 글자를 만든다고 한 점에 민족자주정신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 둘째, '어린(어리석은) 백성'이란 일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한자를 배울 수 없었던 사람들을 위해 배우기 쉬운 글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민본정신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제과정은 조선시대의 일종의 연구소인 집현전의 학자들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박팽년(朴彭年)·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강희안(姜希顔)·이개(李塏)·이선로(李善老) 등 집현전 학자들은 당시 지속적으로 세종의 사업을 뒷받침하는 연구를 수행했다. 훈민정음의 창제에는 당시의 유일한 언어학이었던 중국 운학(韻學)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중국 운학은 일종의 음성학과 음운론의 연구로서 그 주된 목적은 운서편찬에 있었다. 따라서 중국 운학에 관심이 깊었던 학문적 경향이 언어에 대한 관심을 북돋우었고, 그것이 국어의 표기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과 이어진 결과 훈민정음 창제의 기틀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이는 세종이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의문나는 점을 물었고, 성삼문 등으로 하여금 랴오둥[遼東]에 귀양와 있던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黃瓚)에게 13번이나 찾아가서 음운에 관하여 물어보게 했다는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완성된 후, 세종은 3년간의 보충연구 기간을 가졌다. 이 기간 동안 〈용비어천가 龍飛御天歌〉를 지어 훈민정음의 실용성을 시험해 보는 한편, 집현전 학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의 본문을 풀이한 해례서(解例書)를 편찬하게 했다.
세종은 훈민정음을 소개하는 책 이름을 글자 이름과 똑같이 〈훈민정음〉이라 하여 판각했다. 이 책은 오랫동안 전해지지 않다가 1940년 7월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 이한걸(李漢杰)의 집에서 발견되었는데, 현재는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어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책을 〈훈민정음〉해례본, 〈훈민정음〉한문본, 〈훈민정음〉원본이라고 한다. 목판본 1책 33장이다. 사주쌍변(四周雙邊 : 네 테두리가 2줄로 됨)에 유계(有界 : 책의 행간에 경계선이 있음)이고, 소흑구(小黑口 : 책의 중간인 판심의 위아래에 가느다란 검은 줄이 있음)로 되어 있다. 발견 당시 책의 처음 2장이 빠진 것을 나중에 붓글씨로 적어 넣을 때 실수하여 '세종어제서문'의 끝자인 '耳'자가 '矣'자로 바뀐 듯하다(〈세종실록〉에는 '耳'자로 기록됨). 이밖에 주해본 〈훈민정음〉으로는 희방사본(喜方寺本)·박씨본과 일본의 궁내성본(宮內省本)·가나자와본[金澤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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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훈민정음을 만든 이유
http://cafe.daum.net/taostory/1ibJ/5623
시간나시는분들 한번씩 읽어보시면 좋을듯합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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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쿵푸TG
[경]투신강림™
맹쓰아빠
[경]베어
맹쓰아빠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의 뜻이며(訓民正音諺解), '정음'은 '우리나라 말을 정(正)히, 반드시 옳게 쓰는 글'임을 뜻한다(釋譜詳節序).
08:21
2009.10.12.
2009.10.12.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의 뜻이며(訓民正音諺解), '정음'은 '우리나라 말을 정(正)히, 반드시 옳게 쓰는 글'임을 뜻한다(釋譜詳節序)
09:59
2009.10.12.
2009.10.12.
딴지 아닌 딴지...
영어 알파벳 A 하나 만들어져 모양 갖추는데 수백~수천년이 걸렸는데....
한글이라는 글자 전체 만드는데..불과 몇년..???
웬지 세종대왕때 만들어진게 아니라 내려오던것을 정리했다가 아닐런지..
영어 알파벳 A 하나 만들어져 모양 갖추는데 수백~수천년이 걸렸는데....
한글이라는 글자 전체 만드는데..불과 몇년..???
웬지 세종대왕때 만들어진게 아니라 내려오던것을 정리했다가 아닐런지..
10:32
2009.10.12.
2009.10.12.
15:38
2009.10.12.
2009.10.12.
조금더...
중국 상형문자 시초라 불리는 거북이 등껍질의 갑골문자는 한자로 해석이 안되고,,
우리나라 음(이두식)으로 해석해야 겨우 해석이 됩니다....
일본 최초의 시라 불리는 것도....우리나라 음으로 해석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 됩니다..
아쉽게도 역사는 그렇치않다고 말하고 있지만...ㅡㅡ;;
중국 상형문자 시초라 불리는 거북이 등껍질의 갑골문자는 한자로 해석이 안되고,,
우리나라 음(이두식)으로 해석해야 겨우 해석이 됩니다....
일본 최초의 시라 불리는 것도....우리나라 음으로 해석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 됩니다..
아쉽게도 역사는 그렇치않다고 말하고 있지만...ㅡㅡ;;
23:58
2009.10.12.
2009.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