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여행지]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
- [경]푸른광산
- 조회 수 183
- 2007.06.17. 21:34
강원도 아래로 돌아본 여행지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다음 여행지는 곰곰히 생각해본다음, 올려야겠지만..
전남 보성군에 위치한 벌교 같은 곳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주말에는 괜찮은 여행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
올려봅니다..
보성녹차와도 가깝기 때문에
좋은 여행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
지난 휴가길은 차를 몰고 머나먼 길을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양구에서 진해로, 진해에서 광주로, 다시 광주에서 서울로..
휴가에서 돌아와보니 그 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나라를 한 바퀴 다 돌았으니..
하지만 그 나라가 하루만 바짝 달리면 끝나버리는 거리라는 것이
한계가 분명히 다가옴을 느껴야만 했다.
간만에 바라본 진해의 시가지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대학 초년때의 그 감정이 함께 밀려오며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인데,
세월만 흘러가버린 것 같은 쓸쓸함..
광주로 향하던 길에 보인 이정표에 차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벌교'
최근에 들어서야 읽게 되었던 책 가운데 '태백산맥'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읽으면서 항상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곳.
소화다리라는 것이 어떤 곳일까.
안창민이 건너다 총을 맞았던 곳.
그리고 읍내의 중심을 이루었던 다리..
김범우가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건넜던 횡갯다리는 있을까.
과연 어떻게 생긴 것일까.
벌교에 있는 방죽은 아직도 있는 것일까.
우선 벌교 안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벌교의 안내책자라도 찾아 볼 겸..
그곳에서는 작가 조정래의 '고향'이라며 특별히 코너를 마련하여
그의 작품만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책 속의 기억을 떠올린다음..
길을 나섰다.
빨치산과 경찰들의 전투가 벌어졌던 철도가 아직도 있었다.
여러차례 보수 공사를 했겠지만,
그 소설 속에 나온 철도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소화다리.
지금은 부용교로 불리면서 그 옆에 부용2교까지 건설되어 있었다.
동네에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을 그런 다리..
이 다리가 50년대 이전부터 자리를 지켜왔던..
그런 다리였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중에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꼬막요리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참..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뻘밭에서 꼬막을 캐가곤 했었다.
벌교가 꼬막이 유명한가보다..
꼬막집에 들어가서 시킨 것은 꼬막정식이었다.
그나마 이것저것 섞여서 나오는가보다 .
아.. 그래..
이런걸 많이 봤었다.
이걸 꼬막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꼬막을 데쳐놓은 것을 내 앞에 놓고서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건가..
"사장님.. 이거 어떻게 먹는 겁니까?"
사장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가르쳐 준다.
양 손가락으로 꼬막을 쥔 다음
손톱을 이용해서 적당한 각도로 벌려야만 한다.
이렇게 먹는 구만..
꼬막 무침에..
꼬막 전에..
다소 심하게 푸짐해보이는 밥상은
도저히 1인용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야 하나...
하지만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기회이므로,
억지로 먹을 수 밖엔 없었다.
꼬막 무침이 개인적으로...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방죽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나선 길..
다리를 건넜다.
그 다리의 한 끝에는 이 다리가 횡갯다리임을 가르쳐주는 안내문이 서있었다.
아..
이곳이었구나..
드디어 방죽 앞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정말 이곳이 실존하리라고는 장담하지 않았다.
중도라는 것은 일본어로 나카시마로
일제시대에 실제로 사람들을 시켜 쌓게 했다고 한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 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쨌겄소"
그렇게 방노인이 이지숙에게 말했던..
그런 곳이었다.
그 방죽 앞에는 작은 배 하나가 묶여져 있었다.
여지껏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해안 포구를 면하고 있었고,
앞은 순천만으로 틔여있는 곳이었다.
그래 이곳에다 간척지를 만들게 되었구나..
길게 늘어진 방죽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소설에서는 20리라고 적혀있었다.
1리가 400미터 정도가 되니
거의 8킬로미터에 가까운 거리였다.
정말..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이걸.. 사람 손으로 쌓았단 말이구나..
방죽 안쪽으로는 간척지가 보였다.
보통 간척지를 만들고 나서 간기가 제대로 빠지려면
10년이상은 걸린다고 한다.
이곳이 만들어진지는 최소한.. 60여년은 지났겠지..
방죽 바깥으로 조금씩 갯벌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이곳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구언... 만...
갈대숲 같은 것들이 펼쳐지기도 했다.
난 갈대인지는 확신이 서진 않는다..
저게 뭐냐..
그런데 정말...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다..
끝이 보이질 않는다..
바다쪽으로 나아갈 수록
방죽 바깥은 점점 더 넓어지고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나는..
태백산맥은 강원도 어느 산골이 무대인 줄 알았다.
험준한 산골에서 전투를 벌이는 빨치산..
그런 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내가 얼마나 실수를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뿌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착하고 진지했던 그런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았던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경찰이었고, 친일파들이었다.
강자에게 굽신거리면서 잘살게 되었던 그 사람들은
전혀 처벌 받지도 않고, 나라가 바뀌어도 잘먹고 잘살게 되었고,
너무 굶어서 고생하고 피눈물을 보인 것은 언제나 황기가 보인.. 농민들이었다.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꼬막을 캐던 것도 그들이었고,
방죽을 만들기 위해서 피땀을 흘렸던 것도 그들이었다.
어떤 실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며
며칠 밤을 세워가며 읽게 되었다.
그 후에 읽게된 '한강'은 평소에 궁금했던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해주었다.
아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교과서처럼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만에 다다르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피땀흘려만들었다는 중도방죽은..
여전히.. 그 허리를 꺾어 뻗어나가고만 있었다.
더 이상은 걷지 못할 것 같았다.
이 길을 손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힘들었을까..
멀리 눈길을 돌리자
뻘밭이 정말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도방죽에서 아쉬운 발길을 돌리면서도
처음 보게된 뻘밭에서 쉽게 눈을 뗄 순 없었다 .
저 뻘밭이..
지금 내 마음인 것도 같고,
내 처지인 것도 같았다.
근 몇 개월간을 복잡하게 고민해왔던 것이
저 뻘밭에 표현되어있는 것 같았다.
확 틔여진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그간 내 고민들이 어느정도 어루만져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확신을 얻기 위해서
다시 길을 걸어야만 했다..
Charlie sneller, Simple wisdom
다음 여행지는 곰곰히 생각해본다음, 올려야겠지만..
전남 보성군에 위치한 벌교 같은 곳은.. 마음만 먹으면 지금도 주말에는 괜찮은 여행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
올려봅니다..
보성녹차와도 가깝기 때문에
좋은 여행코스가 되지 않을까 싶네요..
===================================================================================================================
지난 휴가길은 차를 몰고 머나먼 길을 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양구에서 진해로, 진해에서 광주로, 다시 광주에서 서울로..
휴가에서 돌아와보니 그 길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우리나라를 한 바퀴 다 돌았으니..
하지만 그 나라가 하루만 바짝 달리면 끝나버리는 거리라는 것이
한계가 분명히 다가옴을 느껴야만 했다.
간만에 바라본 진해의 시가지는 정말 새롭게 다가왔다.
대학 초년때의 그 감정이 함께 밀려오며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이 자리에 그대로 있을 뿐인데,
세월만 흘러가버린 것 같은 쓸쓸함..
광주로 향하던 길에 보인 이정표에 차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벌교'
최근에 들어서야 읽게 되었던 책 가운데 '태백산맥'의 주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읽으면서 항상 머릿속에 그려보았던 곳.
소화다리라는 것이 어떤 곳일까.
안창민이 건너다 총을 맞았던 곳.
그리고 읍내의 중심을 이루었던 다리..
김범우가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건넜던 횡갯다리는 있을까.
과연 어떻게 생긴 것일까.
벌교에 있는 방죽은 아직도 있는 것일까.
우선 벌교 안에 있는 도서관을 찾았다.
벌교의 안내책자라도 찾아 볼 겸..
그곳에서는 작가 조정래의 '고향'이라며 특별히 코너를 마련하여
그의 작품만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그곳에서 잠시 책 속의 기억을 떠올린다음..
길을 나섰다.
빨치산과 경찰들의 전투가 벌어졌던 철도가 아직도 있었다.
여러차례 보수 공사를 했겠지만,
그 소설 속에 나온 철도임을 한 눈에 알아 볼 수가 있었다.
소화다리.
지금은 부용교로 불리면서 그 옆에 부용2교까지 건설되어 있었다.
동네에 예전 같았으면 지나쳤을 그런 다리..
이 다리가 50년대 이전부터 자리를 지켜왔던..
그런 다리였다.
한참을 돌아다니던 중에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꼬막요리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참..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이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서 뻘밭에서 꼬막을 캐가곤 했었다.
벌교가 꼬막이 유명한가보다..
꼬막집에 들어가서 시킨 것은 꼬막정식이었다.
그나마 이것저것 섞여서 나오는가보다 .
아.. 그래..
이런걸 많이 봤었다.
이걸 꼬막이라고 부르는가 보다.
꼬막을 데쳐놓은 것을 내 앞에 놓고서는 망설일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건가..
"사장님.. 이거 어떻게 먹는 겁니까?"
사장이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가르쳐 준다.
양 손가락으로 꼬막을 쥔 다음
손톱을 이용해서 적당한 각도로 벌려야만 한다.
이렇게 먹는 구만..
꼬막 무침에..
꼬막 전에..
다소 심하게 푸짐해보이는 밥상은
도저히 1인용이 아니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야 하나...
하지만 좀처럼 맛볼 수 없는 기회이므로,
억지로 먹을 수 밖엔 없었다.
꼬막 무침이 개인적으로...
제일 맛있었던 것 같다.
방죽을 찾아보기 위해 다시 나선 길..
다리를 건넜다.
그 다리의 한 끝에는 이 다리가 횡갯다리임을 가르쳐주는 안내문이 서있었다.
아..
이곳이었구나..
드디어 방죽 앞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정말 이곳이 실존하리라고는 장담하지 않았다.
중도라는 것은 일본어로 나카시마로
일제시대에 실제로 사람들을 시켜 쌓게 했다고 한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옛적부텀 산몬뎅이에 성 쌓는 것을 질로 심든 부역으로 쳤는디,
고것이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 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워쨌겄소"
그렇게 방노인이 이지숙에게 말했던..
그런 곳이었다.
그 방죽 앞에는 작은 배 하나가 묶여져 있었다.
여지껏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해안 포구를 면하고 있었고,
앞은 순천만으로 틔여있는 곳이었다.
그래 이곳에다 간척지를 만들게 되었구나..
길게 늘어진 방죽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소설에서는 20리라고 적혀있었다.
1리가 400미터 정도가 되니
거의 8킬로미터에 가까운 거리였다.
정말.. 끝이 보이질 않는다.
이걸.. 사람 손으로 쌓았단 말이구나..
방죽 안쪽으로는 간척지가 보였다.
보통 간척지를 만들고 나서 간기가 제대로 빠지려면
10년이상은 걸린다고 한다.
이곳이 만들어진지는 최소한.. 60여년은 지났겠지..
방죽 바깥으로 조금씩 갯벌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이곳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지 잘 모르겠다.
하구언... 만...
갈대숲 같은 것들이 펼쳐지기도 했다.
난 갈대인지는 확신이 서진 않는다..
저게 뭐냐..
그런데 정말...
아무리 걸어도 끝이 없다..
끝이 보이질 않는다..
바다쪽으로 나아갈 수록
방죽 바깥은 점점 더 넓어지고 화려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맨 처음 나는..
태백산맥은 강원도 어느 산골이 무대인 줄 알았다.
험준한 산골에서 전투를 벌이는 빨치산..
그런 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읽어갈수록
내가 얼마나 실수를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그 뿌리가 보이는 것만 같았다.
착하고 진지했던 그런 사람들을 죽이고, 짓밟았던 것은
공산당이 아니라, 경찰이었고, 친일파들이었다.
강자에게 굽신거리면서 잘살게 되었던 그 사람들은
전혀 처벌 받지도 않고, 나라가 바뀌어도 잘먹고 잘살게 되었고,
너무 굶어서 고생하고 피눈물을 보인 것은 언제나 황기가 보인.. 농민들이었다.
푹푹 빠지는 뻘밭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꼬막을 캐던 것도 그들이었고,
방죽을 만들기 위해서 피땀을 흘렸던 것도 그들이었다.
어떤 실체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며
며칠 밤을 세워가며 읽게 되었다.
그 후에 읽게된 '한강'은 평소에 궁금했던
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게 해주었다.
아니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기에
그것은 소설이 아니라, 역사교과서처럼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어느새 만에 다다르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피땀흘려만들었다는 중도방죽은..
여전히.. 그 허리를 꺾어 뻗어나가고만 있었다.
더 이상은 걷지 못할 것 같았다.
이 길을 손으로 만들었으니..
얼마나.. 사람들이 힘들었을까..
멀리 눈길을 돌리자
뻘밭이 정말 거대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중도방죽에서 아쉬운 발길을 돌리면서도
처음 보게된 뻘밭에서 쉽게 눈을 뗄 순 없었다 .
저 뻘밭이..
지금 내 마음인 것도 같고,
내 처지인 것도 같았다.
근 몇 개월간을 복잡하게 고민해왔던 것이
저 뻘밭에 표현되어있는 것 같았다.
확 틔여진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그간 내 고민들이 어느정도 어루만져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새로운 확신을 얻기 위해서
다시 길을 걸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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