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초기, 임금동결·고환율 정책 검토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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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초기, 임금동결·고환율 정책 검토했다
한겨레21 | 기사입력 2008.11.28 18:12
[한겨레21] 전화 한 통에 보고서 쓴 KDI, 이례적으로 톤 높은 비판…
"정중한 말투지만 실제 내용은 '무슨 바보 같은 발상이냐'는 것"
2월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주요 경제정책과 관련한 보고서를 하나 만들어보라는, 정부 고위 당국자의 뜻을 전하는 전화였다. 연구 주제는 환율상승과 임금동결. 정부가 나서서 환율을 올리고 전 국민의 임금을 동결하면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연구해보라는 것이었다. KDI 거시경제팀을 중심으로 연구팀이 꾸려졌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환율정책은 새로운 주제가 아니었고, 전 국민 임금동결도 황당하긴 해도 결론은 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쯤 지난 뒤 '환율 및 임금 관련 정책에 대한 견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3월10일, 그러니까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정확히 보름째 되는 날 정부 쪽에 전달됐다.
좋지 않고, 할 수도 없고…
< 한겨레21 > 이 최근 입수한 이 비공개 보고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환율상승 및 임금동결을 정책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 정권 출범과 거의 동시에, 아니 출범 이전부터 정권 차원에서 검토된 경제운영 철학이 바로 고환율과 임금동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책 방향에 대한 KDI의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둘 다 실현해서도 안 되고 실현할 수도 없는 정책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갓 출범해 의기가 충천한 새 정권의 경제 운용 방향에 대해 국책연구원이 이례적으로 강력한 반대를 표한 이유는 보고서 첫 페이지에 간략히 소개돼 있다.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는 정부가 환율을 타기팅(인위적으로 정해두기)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와 같은 팩트를 거스르고자 했던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는 이미 1997년 외환위기와 2003~04년 환율방어 시기를 통해 경험한 바 있음."(상자기사 참조) "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 임금을 동결한다는 것이 (그것도 환율상승과 같은 인플레이션 정책과 함께)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김."
보고서는 뒤이어 이같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 우선 환율상승 정책을 펼 경우엔 "수출을 늘리는 반면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국내 물가를 상승시켜 내수를 위축시키고 특히 설비투자의 위축 효과는 더욱 클 것"이라고 우려의 뜻을 밝혔다. 환율을 올리는 것 자체는 "가계에 부담을 발생시키는 만큼 기업(특히 수출기업)의 수익성을 개선시키는 요인"이라며 "이는 소비자 및 내수기업에 조세를 부과하여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결론 부분에서는 심지어 "장기간 인위적인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세계 금융시장을 상대로 한국 정부가 도박을 벌여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 있는 환율상승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불투명함"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환율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좋지 않은 정책일뿐더러, 오래 유지하려야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차가운 진단을 내린 셈이다.
실현하려야 실현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전 국민 임금동결' 정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고서는 임금동결에 대해 "단기적으로는 물가가 하락하는 동시에 생산이 증가하는 모습을 상정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와 같은 효과는 그야말로 단기적 효과에 불과한 것이며, 중장기적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과 같은 보다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같은 예측보다도 무게가 실리는 지점은 "임금동결을 내세우기는 정치적으로도 지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대목이다. △최근 노동소득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점 △물가상승률이 높은 상황으로 임금동결을 내세울 명분도 거의 없다는 점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임금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비슷한 수준이고 수출기업인 제조업의 경우에는 생산성 증가율이 실질임금상승률을 크게 상회하는 점 △기업 비용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하락하는 추세인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다(그래프 참조). 한마디로 생산성 향상률에 비해 임금상승률이 더 낮고 물가까지 크게 뛰는 마당에 그런 아이디어가 가당키나 하겠냐는 것이다.
기업에 이익 되고 양극화 심화되는 결론
이같은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KDI 연구위원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내더라도 완곡하게 반대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보통인데, KDI에서 이렇게까지 (비판하는) 톤이 높은 보고서를 내다니 좀 이례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위원은 "'해서는 안 된다'는 정중한 말투지만 실제 내용은 '무슨 바보 같은 발상이냐'고 깨는 것"이라며 "개별 기업들이 알아서 할 임금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동결하면 어떻겠냐는 발상 자체가 너무 황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KDI는 공식적으로는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 11월19일 < 한겨레21 > 취재진과 만난 KDI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런 보고서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비공개 보고서에 대해서는 뭐라 코멘트할 수 없다"며 "KDI의 기본 스탠스는 가격 정책은 시장에 맡겨야지 누가 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취재진의 계속된 질문에 "보고서 내용이 전부다. 우리는 정부가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라며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시장의 흐름에 반하는 정책을 취하려고 하기에 이를 지적했을 뿐이란 것이다.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KDI의 강력한 반대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 국민 임금동결이야 어차피 실행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템이었지만, 환율과 관련해서는 가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고환율 정책 기조가 확연했다. 물론 그 한가운데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있었다.
강 장관은 최근 "고환율 정책을 펼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가 환율상승을 통해 경상수지를 개선하고 성장률을 높이려고 한 것은 경제정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비서관과 경제수석비서관,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이 참석하는 청와대 서별관회의(거시경제정책협의회)에서도 환율정책을 두고 강 장관은 다른 참석자들과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강 장관은 부인했지만, 정부가 출범 초기 환율상승을 유도했거나 최소한 용인 또는 묵인하는 정책을 폈다는 사실이 이 보고서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물론 그 뿌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닿아 있다. 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일부는 친기업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꺼리지만 나는 당당하게 쓰겠다. 새로운 정부가 친기업적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1월2일 경제연구소장들과의 간담회)고 밝히는 등 '친기업'을 유난히 강조해왔다. 그런데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의 공통점은 현실화됐을 경우 두 정책 모두 단기적으로 기업들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이다. 보고서에서는 고환율 정책을 두고 "소비자 및 내수기업에 조세를 부과하여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과 유사"하다고 지적했으며, 임금동결에 대해서는 "가계소득을 기업소득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KDI 보고서는 또 "수출기업의 수익이 증가할 경우 근로자의 임금 상승과 납품 기업의 이익 증대에 따른 내수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타당성이 높아 보이지 않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말리기 위해 청와대가 발주했다?
이는 환율상승 정책을 통해 기업의 이익 창출을 도우면 순익이 늘고 투자 의욕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생산 → 고용 → 소득 → 소비 → 수출 → 연구·개발을 순차적으로 확대시킬 것이라는 환율상승론자(환율주권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고환율 정책은 물가 상승 → 내수 부진 → 양극화 심화라는 부작용만 불러올 뿐이라는 얘기다. 결국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은 전체 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것과 무관한, 그냥 '부의 이전'에 불과하다는 얘기인 셈이다.
한편, 보고서를 발주한 정확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KDI에 이런 연구과제를 줄 수 있는 곳은 청와대나 기획재정부 정도인데, KDI 쪽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KDI 고위 관계자는 보고서 발주처와 관련해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며 말을 아꼈다. 보고서 작성 주무를 맡았던 조동철 KDI 거시경제팀장은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에 관한) 그런 말들이 당시에 오갔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한 것 아니겠냐"면서도 어디에서 보고서를 만들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청한 한 KDI 연구위원은 "환율정책 등 보고서에서 언급된 내용들로 봐서는 100% '최·강(최중경 기획재정부 전 차관·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라인'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강 장관이 잡은 정책 방향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연구용역을 발주하자 KDI가 작심하고 반대 뜻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청와대 "그런 보고서 얘기는 처음"
반대로, 정말 그랬다면 KDI가 이렇게 강력한 톤으로 반대 뜻을 개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기획재정부와 KDI는 평소 수없이 많은 보고서를 주고받는, 업무상 매우 긴밀한 관계인데 KDI가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보고서 발주처가 청와대라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특히 정권 초기 청와대 경제라인 쪽에서 강 장관의 고환율 정책 등 '무모한 발상'을 말리기 위해 보고서를 만들도록 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고서가 '이례적으로 강경한 톤'으로 씌여진 점이 설명된다.
하지만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는 "환율상승과 임금동결 모두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 용역을 정부가 줬을 리 있겠냐"며 "그런 보고서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듣는다. 혹시 기획재정부가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청와대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환율 개입해서 일어난 일
1997년 구제금융, 2004년 10조 손실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는 환율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1997년 외환위기 때와 2003~2004년 환율방어 시기를 돌이켜보면 그 이유가 명확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당시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1997년 외환위기 때는 환율이 급격히 상승(원화 가치 하락)하자 정부가 얼마 있지도 않은 달러를 시장에 풀었다. 하지만 시장의 힘은 당해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러를 쌓아놓던 곳간은 텅 비었고 정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만 했다. 구조적으로는 우리 경제구조의 선진화 시기를 놓친 데 따라 위기가 왔다고 볼 수 있지만, 정부의 '달러 좀 내다팔면 안정을 되찾겠지'라는 안이한 대응이 사건을 확대시킨 면도 있는 셈이다.
2003~2004년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는 고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는데, 이때 외국환평형기금(정부가 발행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으로 조성되는 돈)을 동원해 '역외차액선물환시장'이라는 파생시장에 들어갔다가 무려 1조8천억원의 손해를 본 것이다. 여기에 환율 하락을 막기 위해 달러를 대규모로 사들였다가 나중에 원-달러 환율이 뚝 떨어지면서 입게 된 환차손도 5조원이 넘었다. 고환율을 유지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1192원에 달했지만, 정부가 시장에서 손을 떼자 환율은 1035원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해 외국환평형기금의 당기순손실은 10조2205억원에 달했다. 2003년의 20배가 넘는 규모였다.
정부가 이처럼 환율에 개입했다가 큰 손해를 입은 사실은 2004년 10월 재정경제부 국정감사 때 심상정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이헌재 부총리를 강하게 추궁하면서 언론에 크게 보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관료들의 시대착오적인 환율시장 개입으로 나랏돈 수조원이 허공에 날아간 셈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는 없는 일. 당시 파생상품 손해의 책임자였던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이 문책성 외유를 떠나야만 했는데, 그가 다름 아닌 최중경 전 기획재정부 차관이다.
국제개발은행(IBRD) 이사로 있다가 현 정부 출범과 함께 기획재정부 차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해 강만수 장관과 호흡을 맞춰온 그는 지난 7월 경질됐다. 경제정책 실패가 이유였는데, 강 장관을 살리기 위한 '대리 경질'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는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그랬지만 실무적으로 환율 문제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며 "그의 경질은 이런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에서 환율 정책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서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함께 잘못된 환율 정책으로 국가 경제에 엄청난 손실을 끼쳐 '마이너스의 손'으로까지 불린 최 전 차관은 지난 8월 필리핀 대사로 임명돼 '보은 인사'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합리적 임금억제가 가능하려면
사회적 합의·적절한 반대급부 있어야
21세기인 오늘날 정부에 의한 전 국민 임금동결은 발상 자체가 희한해 보이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이와 비슷한 정책이 실제로 집행됐다. 1980년대에 시행된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이 대표적이다.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이란 정부가 일반 기업들의 기본금 인상률을 일괄적으로 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면서 기업들의 인재 수요는 크게 늘었고, 또 파이가 커진 만큼 노동자들이 제 몫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움직임은 특히 1987년 민주화 항쟁에 뒤이은 대규모 파업 사태를 거치며 더욱 확대됐다.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과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 사이에서 기업들은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묘수를 찾아냈다. 기본금 인상률은 낮게 하되 상여금과 각종 수당 등의 인상률을 크게 높인 것이다. 90년대 초반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사는 기본급 5~6%가량을 인상하는 수준에서 합의했다며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지만, 지급된 액수를 기준으로 한 실제 임금상승률은 보통 10%를 넘었다. 결국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가 임금체제를 복잡하게 만든 셈이다.
정부의 임금 개입은 또 불필요한 노사분쟁을 초래하기도 했다. 임금 수준이 회사 이익이나 경기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의지 등 자의적 요소들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눈으로 본 노동자들은 파업 등을 통해 힘을 과시하고 최대한 더 높은 임금상승률을 보장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임금에 대한 직접 통제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90년대 초반 수당 등을 망라해 계산하는 총액임금제를 도입한 것이다. 물론 이 정책 또한 효과는 없었다.
80~90년대 유럽에서도 임금안정 또는 임금동결 정책이 있었지만, 이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임금을 낮추되 일자리를 늘리자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다. 나라별로 실제 모델과 그 효과는 달랐는데, 네덜란드와 아일랜드가 가장 성공적인 예로 손꼽힌다. 이 두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포기하는 대신 노동 시간 단축과 새 일자리 창출, 세금 감면 등 적절한 혜택을 제공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방편으로 임금억제 정책이 시행되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는 과도한 임금인상을 포기한 대신 정부는 노동자의 소득세를 낮춰줬고, 기업들은 충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주고받기'가 이뤄졌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합리적 임금인상 억제정책이 가능하려면 노·사·정 합의에 바탕한 적절한 반대급부가 필수인 셈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노·사·정 대화 기구가 유명무실하고 △사회 안전망은 부실하고 △물가 또한 크게 들썩거리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당분간 임금동결 내지는 임금안정 정책은 현실성이 전혀 없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http://zine.media.daum.net/h21/view.html?cpid=18&newsid=20081128181207622&p=hani21
한겨레21 | 기사입력 2008.11.28 18:12
[한겨레21] 전화 한 통에 보고서 쓴 KDI, 이례적으로 톤 높은 비판…
"정중한 말투지만 실제 내용은 '무슨 바보 같은 발상이냐'는 것"
2월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국개발연구원(KDI)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새 정부가 추진하려는 주요 경제정책과 관련한 보고서를 하나 만들어보라는, 정부 고위 당국자의 뜻을 전하는 전화였다. 연구 주제는 환율상승과 임금동결. 정부가 나서서 환율을 올리고 전 국민의 임금을 동결하면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지 연구해보라는 것이었다. KDI 거시경제팀을 중심으로 연구팀이 꾸려졌다.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환율정책은 새로운 주제가 아니었고, 전 국민 임금동결도 황당하긴 해도 결론은 뻔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일주일쯤 지난 뒤 '환율 및 임금 관련 정책에 대한 견해'라는 제목의 보고서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3월10일, 그러니까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정확히 보름째 되는 날 정부 쪽에 전달됐다.
좋지 않고, 할 수도 없고…
< 한겨레21 > 이 최근 입수한 이 비공개 보고서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환율상승 및 임금동결을 정책적으로 추진하고자 하는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 정권 출범과 거의 동시에, 아니 출범 이전부터 정권 차원에서 검토된 경제운영 철학이 바로 고환율과 임금동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정책 방향에 대한 KDI의 결론은 '아니올시다'였다. 둘 다 실현해서도 안 되고 실현할 수도 없는 정책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갓 출범해 의기가 충천한 새 정권의 경제 운용 방향에 대해 국책연구원이 이례적으로 강력한 반대를 표한 이유는 보고서 첫 페이지에 간략히 소개돼 있다. "자본시장이 개방된 상황에서는 정부가 환율을 타기팅(인위적으로 정해두기)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며, 이와 같은 팩트를 거스르고자 했던 대가가 얼마나 컸는지는 이미 1997년 외환위기와 2003~04년 환율방어 시기를 통해 경험한 바 있음."(상자기사 참조) "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 임금을 동결한다는 것이 (그것도 환율상승과 같은 인플레이션 정책과 함께) 어떻게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생김."
보고서는 뒤이어 이같은 정책을 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조목조목 나열하고 있다. 우선 환율상승 정책을 펼 경우엔 "수출을 늘리는 반면 수입물가 상승을 통해 국내 물가를 상승시켜 내수를 위축시키고 특히 설비투자의 위축 효과는 더욱 클 것"이라고 우려의 뜻을 밝혔다. 환율을 올리는 것 자체는 "가계에 부담을 발생시키는 만큼 기업(특히 수출기업)의 수익성을 개선시키는 요인"이라며 "이는 소비자 및 내수기업에 조세를 부과하여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다. 결론 부분에서는 심지어 "장기간 인위적인 환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전세계 금융시장을 상대로 한국 정부가 도박을 벌여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의미 있는 환율상승을 어느 정도 유지할 수 있을지는 지극히 불투명함"이라고 지적했을 정도다. 환율에 대한 인위적 개입은 좋지 않은 정책일뿐더러, 오래 유지하려야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라는 차가운 진단을 내린 셈이다.
실현하려야 실현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는 '전 국민 임금동결' 정책 또한 마찬가지였다. 보고서는 임금동결에 대해 "단기적으로는 물가가 하락하는 동시에 생산이 증가하는 모습을 상정할 수 있다"면서 "그러나 이와 같은 효과는 그야말로 단기적 효과에 불과한 것이며, 중장기적으로는 스태그플레이션과 같은 보다 큰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같은 예측보다도 무게가 실리는 지점은 "임금동결을 내세우기는 정치적으로도 지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대목이다. △최근 노동소득분배율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점 △물가상승률이 높은 상황으로 임금동결을 내세울 명분도 거의 없다는 점 △(1997년) 경제위기 이후 임금상승률은 노동생산성 증가율과 비슷한 수준이고 수출기업인 제조업의 경우에는 생산성 증가율이 실질임금상승률을 크게 상회하는 점 △기업 비용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하락하는 추세인 점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됐다(그래프 참조). 한마디로 생산성 향상률에 비해 임금상승률이 더 낮고 물가까지 크게 뛰는 마당에 그런 아이디어가 가당키나 하겠냐는 것이다.
기업에 이익 되고 양극화 심화되는 결론
이같은 보고서 내용과 관련해 이름을 밝히지 말 것을 요청한 한 KDI 연구위원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내더라도 완곡하게 반대의 뜻을 표현하는 것이 보통인데, KDI에서 이렇게까지 (비판하는) 톤이 높은 보고서를 내다니 좀 이례적인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위원은 "'해서는 안 된다'는 정중한 말투지만 실제 내용은 '무슨 바보 같은 발상이냐'고 깨는 것"이라며 "개별 기업들이 알아서 할 임금 문제를 정부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동결하면 어떻겠냐는 발상 자체가 너무 황당한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KDI는 공식적으로는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 11월19일 < 한겨레21 > 취재진과 만난 KDI의 한 고위 관계자는 "이런 보고서를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비공개 보고서에 대해서는 뭐라 코멘트할 수 없다"며 "KDI의 기본 스탠스는 가격 정책은 시장에 맡겨야지 누가 뭐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취재진의 계속된 질문에 "보고서 내용이 전부다. 우리는 정부가 이런 식으로 하는 건 옳지 않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라며 더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정부가 시장의 흐름에 반하는 정책을 취하려고 하기에 이를 지적했을 뿐이란 것이다.
여기서 안타까운 점은 KDI의 강력한 반대 뜻이 관철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전 국민 임금동결이야 어차피 실행 자체가 불가능한 아이템이었지만, 환율과 관련해서는 가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실제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고환율 정책 기조가 확연했다. 물론 그 한가운데는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있었다.
강 장관은 최근 "고환율 정책을 펼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가 환율상승을 통해 경상수지를 개선하고 성장률을 높이려고 한 것은 경제정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심지어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비서관과 경제수석비서관, 기획재정부 장관, 한국은행 총재, 금융위원장이 참석하는 청와대 서별관회의(거시경제정책협의회)에서도 환율정책을 두고 강 장관은 다른 참석자들과 여러 차례 의견 충돌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강 장관은 부인했지만, 정부가 출범 초기 환율상승을 유도했거나 최소한 용인 또는 묵인하는 정책을 폈다는 사실이 이 보고서를 통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물론 그 뿌리는 이명박 대통령과 닿아 있다. 이 대통령은 당선인 시절 "일부는 친기업적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꺼리지만 나는 당당하게 쓰겠다. 새로운 정부가 친기업적으로 간다고 하는 것은 분명하다"(1월2일 경제연구소장들과의 간담회)고 밝히는 등 '친기업'을 유난히 강조해왔다. 그런데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의 공통점은 현실화됐을 경우 두 정책 모두 단기적으로 기업들에 이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이다. 보고서에서는 고환율 정책을 두고 "소비자 및 내수기업에 조세를 부과하여 수출기업에 보조금을 주는 정책과 유사"하다고 지적했으며, 임금동결에 대해서는 "가계소득을 기업소득으로 이전시키는 것"이라고 밝혔다. KDI 보고서는 또 "수출기업의 수익이 증가할 경우 근로자의 임금 상승과 납품 기업의 이익 증대에 따른 내수 확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으나, 타당성이 높아 보이지 않음"이라고 밝히고 있다.
말리기 위해 청와대가 발주했다?
이는 환율상승 정책을 통해 기업의 이익 창출을 도우면 순익이 늘고 투자 의욕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생산 → 고용 → 소득 → 소비 → 수출 → 연구·개발을 순차적으로 확대시킬 것이라는 환율상승론자(환율주권론자)들의 주장과 달리, 고환율 정책은 물가 상승 → 내수 부진 → 양극화 심화라는 부작용만 불러올 뿐이라는 얘기다. 결국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은 전체 경제의 선순환을 촉진하는 것과 무관한, 그냥 '부의 이전'에 불과하다는 얘기인 셈이다.
한편, 보고서를 발주한 정확한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 의문으로 남는다. KDI에 이런 연구과제를 줄 수 있는 곳은 청와대나 기획재정부 정도인데, KDI 쪽에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KDI 고위 관계자는 보고서 발주처와 관련해 "여기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며 말을 아꼈다. 보고서 작성 주무를 맡았던 조동철 KDI 거시경제팀장은 "(환율상승과 임금동결에 관한) 그런 말들이 당시에 오갔기 때문에 우리가 연구한 것 아니겠냐"면서도 어디에서 보고서를 만들라고 했는지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익명을 요청한 한 KDI 연구위원은 "환율정책 등 보고서에서 언급된 내용들로 봐서는 100% '최·강(최중경 기획재정부 전 차관·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 라인'을 염두에 두고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강 장관이 잡은 정책 방향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연구용역을 발주하자 KDI가 작심하고 반대 뜻을 담은 보고서를 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청와대 "그런 보고서 얘기는 처음"
반대로, 정말 그랬다면 KDI가 이렇게 강력한 톤으로 반대 뜻을 개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기획재정부와 KDI는 평소 수없이 많은 보고서를 주고받는, 업무상 매우 긴밀한 관계인데 KDI가 이렇게 대놓고 면박을 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보고서 발주처가 청와대라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특히 정권 초기 청와대 경제라인 쪽에서 강 장관의 고환율 정책 등 '무모한 발상'을 말리기 위해 보고서를 만들도록 했다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보고서가 '이례적으로 강경한 톤'으로 씌여진 점이 설명된다.
하지만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는 "환율상승과 임금동결 모두 정부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그런 용역을 정부가 줬을 리 있겠냐"며 "그런 보고서에 대한 얘기는 처음 듣는다. 혹시 기획재정부가 어떻게 관련돼 있는지 모르겠지만 청와대와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환율 개입해서 일어난 일
1997년 구제금융, 2004년 10조 손실
한국개발연구원(KDI) 보고서는 환율을 정부가 인위적으로 조정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1997년 외환위기 때와 2003~2004년 환율방어 시기를 돌이켜보면 그 이유가 명확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과연 당시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우선 1997년 외환위기 때는 환율이 급격히 상승(원화 가치 하락)하자 정부가 얼마 있지도 않은 달러를 시장에 풀었다. 하지만 시장의 힘은 당해낼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달러를 쌓아놓던 곳간은 텅 비었고 정부는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해야만 했다. 구조적으로는 우리 경제구조의 선진화 시기를 놓친 데 따라 위기가 왔다고 볼 수 있지만, 정부의 '달러 좀 내다팔면 안정을 되찾겠지'라는 안이한 대응이 사건을 확대시킨 면도 있는 셈이다.
2003~2004년의 사례는 더욱 극적이다. 당시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는 고환율을 유지하기 위해 시장에 개입했는데, 이때 외국환평형기금(정부가 발행하는 외국환평형기금채권으로 조성되는 돈)을 동원해 '역외차액선물환시장'이라는 파생시장에 들어갔다가 무려 1조8천억원의 손해를 본 것이다. 여기에 환율 하락을 막기 위해 달러를 대규모로 사들였다가 나중에 원-달러 환율이 뚝 떨어지면서 입게 된 환차손도 5조원이 넘었다. 고환율을 유지할 당시 원-달러 환율은 1192원에 달했지만, 정부가 시장에서 손을 떼자 환율은 1035원까지 떨어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해 외국환평형기금의 당기순손실은 10조2205억원에 달했다. 2003년의 20배가 넘는 규모였다.
정부가 이처럼 환율에 개입했다가 큰 손해를 입은 사실은 2004년 10월 재정경제부 국정감사 때 심상정 당시 민주노동당 의원이 이헌재 부총리를 강하게 추궁하면서 언론에 크게 보도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관료들의 시대착오적인 환율시장 개입으로 나랏돈 수조원이 허공에 날아간 셈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을 수는 없는 일. 당시 파생상품 손해의 책임자였던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이 문책성 외유를 떠나야만 했는데, 그가 다름 아닌 최중경 전 기획재정부 차관이다.
국제개발은행(IBRD) 이사로 있다가 현 정부 출범과 함께 기획재정부 차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해 강만수 장관과 호흡을 맞춰온 그는 지난 7월 경질됐다. 경제정책 실패가 이유였는데, 강 장관을 살리기 위한 '대리 경질' 논란이 일기도 했다. 당시 청와대는 "물가 관리 측면에서도 그랬지만 실무적으로 환율 문제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며 "그의 경질은 이런 여론을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노무현 정부에서 환율 정책에 실패했을 뿐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서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과 함께 잘못된 환율 정책으로 국가 경제에 엄청난 손실을 끼쳐 '마이너스의 손'으로까지 불린 최 전 차관은 지난 8월 필리핀 대사로 임명돼 '보은 인사' 논란이 일기도 했다.
합리적 임금억제가 가능하려면
사회적 합의·적절한 반대급부 있어야
21세기인 오늘날 정부에 의한 전 국민 임금동결은 발상 자체가 희한해 보이지만,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이와 비슷한 정책이 실제로 집행됐다. 1980년대에 시행된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이 대표적이다.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이란 정부가 일반 기업들의 기본금 인상률을 일괄적으로 정하는 제도를 말한다. 하지만 경제가 성장하면서 기업들의 인재 수요는 크게 늘었고, 또 파이가 커진 만큼 노동자들이 제 몫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움직임은 특히 1987년 민주화 항쟁에 뒤이은 대규모 파업 사태를 거치며 더욱 확대됐다.
정부의 임금 가이드라인 정책과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 사이에서 기업들은 양쪽 모두를 만족시킬 묘수를 찾아냈다. 기본금 인상률은 낮게 하되 상여금과 각종 수당 등의 인상률을 크게 높인 것이다. 90년대 초반 대규모 사업장에서 노사는 기본급 5~6%가량을 인상하는 수준에서 합의했다며 악수를 나누고 사진을 찍었지만, 지급된 액수를 기준으로 한 실제 임금상승률은 보통 10%를 넘었다. 결국 정부의 불필요한 규제가 임금체제를 복잡하게 만든 셈이다.
정부의 임금 개입은 또 불필요한 노사분쟁을 초래하기도 했다. 임금 수준이 회사 이익이나 경기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정부 의지 등 자의적 요소들에 의해 정해지는 것을 눈으로 본 노동자들은 파업 등을 통해 힘을 과시하고 최대한 더 높은 임금상승률을 보장받으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정부는 임금에 대한 직접 통제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다. 90년대 초반 수당 등을 망라해 계산하는 총액임금제를 도입한 것이다. 물론 이 정책 또한 효과는 없었다.
80~90년대 유럽에서도 임금안정 또는 임금동결 정책이 있었지만, 이는 실업률을 낮추기 위해서였다. 임금을 낮추되 일자리를 늘리자는 '사회적 합의'에 따른 것이다. 나라별로 실제 모델과 그 효과는 달랐는데, 네덜란드와 아일랜드가 가장 성공적인 예로 손꼽힌다. 이 두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포기하는 대신 노동 시간 단축과 새 일자리 창출, 세금 감면 등 적절한 혜택을 제공받았다.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방편으로 임금억제 정책이 시행되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는 과도한 임금인상을 포기한 대신 정부는 노동자의 소득세를 낮춰줬고, 기업들은 충분한 일자리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일종의 '주고받기'가 이뤄졌다.
결국 현대사회에서 합리적 임금인상 억제정책이 가능하려면 노·사·정 합의에 바탕한 적절한 반대급부가 필수인 셈이다. 이는 뒤집어 말하면 △노·사·정 대화 기구가 유명무실하고 △사회 안전망은 부실하고 △물가 또한 크게 들썩거리는 우리나라 현실에서는 당분간 임금동결 내지는 임금안정 정책은 현실성이 전혀 없는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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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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캬...... 어의가 없네요. 국민탓, 환율탓으로 돌리드만 쓰래기 보다 못한 넘들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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