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그 뒷 이야기...(김진혁pd글)
- [서경]파란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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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보면 난 그저 드라마를 좋아하던 평범한 방송사 준비생이었다. 또 돌아 보면 난 그래서 이베스에 입사한 걸 항상 멋쩍어 하던 마이너 방송사 pd였고, 자꾸 돌아 보면 그래서 난 매번 타 방송사를 기웃거리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아주 우연히 효도우미 0700이란 프로그램을 연출하게 됐다. 시니어 pd들이 주로 연출하던 프로그램이란 것과 소위 '노인 프로그램'이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던 시기, 하지만 '뭐 어차피 드라마도 못하는데 아무려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6개월의 시간은 내게 많은 충격을 주게 된다. 난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아주 많다는 것, 무엇보다 내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에 경악했다. 난 광주 항쟁이나 그 이외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을 때보다도 훨씬 더 경악을 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건 '역사적 사실'로도 결코 기록되지 않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미래의 조건이란 프로그램으로 옮겨가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분들을 위해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팀장님에게 건의 했고, 소위 '미담'이란 컨셉으로 5편을 제작하게 됐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한분, 정확히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내가 이름 기억 장애가 있다) '동대문의 작은 거인'이란 제목을 붙였던 장애인 분을 follow하는 편을 제작했다.
본인이 장애인이었지만, 장애인을 위해서 많은 애를 쓰셨던 그 분을 follow하다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동대문 운동장 안을 들어가게 됐다. 이게 왜 우연한 계기냐하면 애초에 촬영 계획엔 동대문 운동장 밖에 있는 한 노숙자 분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찍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촬영이 마무리 될 무렵, 휠체어를 밀고 가는 모습을 찍고자 했고 그 분은 그냥 동대문 운동장 안으로 쑤~욱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도 동대문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그 때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모습은 내가 예상 했던 '운동장'이 아니라, 무슨 '난민촌'의 그것이었다.
부끄럽게도 난 '청계천' 상인들이 복원사업으로 철거를 당했다는 사실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쫓겨난 그들이 동대문 운동장에 '풍물 시장'이라는 거의 보이지 않는 간판을 달아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 난 아직도 그곳에서 고교 야구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 인상이 얼마나 강했는지 지식채널e를 시작해서 처음으로 만든 society 편이 '잊혀진 대한민국-철거민'편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얼마나 계속 이어졌는지 그 이후 1년이 지나 다시 동대문 운동장을 찾아서 만든 편이(그러니까 1년 이후에도 그들은 거기서 계속 장사중이었다는 얘기다. 이미 오세훈 시장으로 바뀌었고...) merry christma & happy new year 편이었다.
내가 가장 분노했던 건, 처음 갔을 때도 그리고 1년 후에 찾았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약속했던 '세계적인 풍물시장'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상인들 중 상당수가 자살을 시도하거나 실제로 자살하고, 시장이 바뀌고 나서는 또 다른 재건축과 문화 시설을 만들겠다는 얘기를 언론에 흘리는 와중이었는데도 그 순진한 바보 같은 멍청한 사람들은 '세계적 풍물시장'이라는 그 '단어'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난 덕분에 드라마에 대한 나의 꿈을 접어 놓을 수 있었다. 그저 영화가 좋았고, 그저 드라마가 좋았던 평범한 pd는 이후 지식채널e에 수많은 society 카테고리들을 만들어 놓는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 우리가-사실은 바로 내가-잊고 있었던 무언가와, 그 무언가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프로그램을 만드는 내내 날 짓누르게 된다.
만약 내가 그때 동대문 운동장 안을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다. 아마 이후 나의 삶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죽지 말라며 10만원짜리 쌀 교환권을 자살을 시도했던 상인에게 건네던 그 작은 거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명박 시장 욕을 해대며 잔치 국수를 건네던 좌판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여전히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수많은 관객들이 고교 야구에 열광하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용산 참사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광우병 파동보다 더 많은 생각이. 그리고 다시 찾아갔을 때 그분들의 '보상'에 해가 될까바 두번째 편을 부드럽게 만들었던 것이 과연 잘 한 것이 었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매듭이 지어진 것은 바로 거기였는데, 내가 그때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청계천에서 시작된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원죄도, 그리고 새물 맞이 행사 때 그 곳에 서서 같이 박수를 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죄도. 이후 청계천을 연인과 동료와 함께 한가로이 거닐던 많은 이들의 원죄도. 그 위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촛불을 들던 수많은 시민들의 원죄도...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난쏘공을 세상으로 불러들인 곳이 그곳이다...
그리고 나의 원죄도 바로 그곳에 있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됐다. 아마 그 매듭을 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결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래서 애초에 '역사'가 될 자격조차 박탈당한 이들의 절규를, 그 한 맺힌 울부짖음을 청량하게 흐르는 청계천 물소리나, 깡하고 경쾌하게 울리는 배팅소리로 잘 못 듣는다면 우리는 용산참사와 같은 일을 보고 또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맘 편히 드라마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그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 풍물 시장'에서 많은 이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아래 주소는 철거민중 한분이 올린글..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26&articleId=28417&hisBbsId=best&pageIndex=1&sortKey=readCount&limitDate=-30&lastLimitDate
마음이 너무 무겁고..뭔가에 짖눌린 답답한...
그러던 중 우연히 아주 우연히 효도우미 0700이란 프로그램을 연출하게 됐다. 시니어 pd들이 주로 연출하던 프로그램이란 것과 소위 '노인 프로그램'이란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모르던 시기, 하지만 '뭐 어차피 드라마도 못하는데 아무려면 어때'라는 생각으로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 6개월의 시간은 내게 많은 충격을 주게 된다. 난 내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것도 아~주 아주 많다는 것, 무엇보다 내가 이런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것에 경악했다. 난 광주 항쟁이나 그 이외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됐을 때보다도 훨씬 더 경악을 했는데 그 이유는 간단했다. 이건 '역사적 사실'로도 결코 기록되지 않을 끔찍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후 미래의 조건이란 프로그램으로 옮겨가면서 그렇게 어렵게 살고 있는 분들을 위해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팀장님에게 건의 했고, 소위 '미담'이란 컨셉으로 5편을 제작하게 됐다. 그리고 그 중에서 한분, 정확히 이름은 기억이 안나지만(내가 이름 기억 장애가 있다) '동대문의 작은 거인'이란 제목을 붙였던 장애인 분을 follow하는 편을 제작했다.
본인이 장애인이었지만, 장애인을 위해서 많은 애를 쓰셨던 그 분을 follow하다가 아주 우연한 계기로 동대문 운동장 안을 들어가게 됐다. 이게 왜 우연한 계기냐하면 애초에 촬영 계획엔 동대문 운동장 밖에 있는 한 노숙자 분과 이야기하는 장면을 찍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촬영이 마무리 될 무렵, 휠체어를 밀고 가는 모습을 찍고자 했고 그 분은 그냥 동대문 운동장 안으로 쑤~욱 휠체어를 밀고 들어가니,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도 동대문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그 때 내 눈앞에 펼쳐져 있던 모습은 내가 예상 했던 '운동장'이 아니라, 무슨 '난민촌'의 그것이었다.
부끄럽게도 난 '청계천' 상인들이 복원사업으로 철거를 당했다는 사실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쫓겨난 그들이 동대문 운동장에 '풍물 시장'이라는 거의 보이지 않는 간판을 달아 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줄도 몰랐다. 솔직히 말해 난 아직도 그곳에서 고교 야구를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그 인상이 얼마나 강했는지 지식채널e를 시작해서 처음으로 만든 society 편이 '잊혀진 대한민국-철거민'편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이 얼마나 계속 이어졌는지 그 이후 1년이 지나 다시 동대문 운동장을 찾아서 만든 편이(그러니까 1년 이후에도 그들은 거기서 계속 장사중이었다는 얘기다. 이미 오세훈 시장으로 바뀌었고...) merry christma & happy new year 편이었다.
내가 가장 분노했던 건, 처음 갔을 때도 그리고 1년 후에 찾았을 때도 그들은 여전히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약속했던 '세계적인 풍물시장'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상인들 중 상당수가 자살을 시도하거나 실제로 자살하고, 시장이 바뀌고 나서는 또 다른 재건축과 문화 시설을 만들겠다는 얘기를 언론에 흘리는 와중이었는데도 그 순진한 바보 같은 멍청한 사람들은 '세계적 풍물시장'이라는 그 '단어'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난 덕분에 드라마에 대한 나의 꿈을 접어 놓을 수 있었다. 그저 영화가 좋았고, 그저 드라마가 좋았던 평범한 pd는 이후 지식채널e에 수많은 society 카테고리들을 만들어 놓는다. 좌파 우파 진보 보수가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넘어 우리가-사실은 바로 내가-잊고 있었던 무언가와, 그 무언가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프로그램을 만드는 내내 날 짓누르게 된다.
만약 내가 그때 동대문 운동장 안을 들어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스스로 물어본 적이 있다. 아마 이후 나의 삶이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죽지 말라며 10만원짜리 쌀 교환권을 자살을 시도했던 상인에게 건네던 그 작은 거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명박 시장 욕을 해대며 잔치 국수를 건네던 좌판 아주머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냥 여전히 그곳에는 언제나처럼 수많은 관객들이 고교 야구에 열광하고 있는 줄 알았더라면...
용산 참사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광우병 파동보다 더 많은 생각이. 그리고 다시 찾아갔을 때 그분들의 '보상'에 해가 될까바 두번째 편을 부드럽게 만들었던 것이 과연 잘 한 것이 었을까 하는 후회도 들었다. 매듭이 지어진 것은 바로 거기였는데, 내가 그때 너무 쉽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모든 것이 청계천에서 시작된 것 같다. 이명박 대통령의 원죄도, 그리고 새물 맞이 행사 때 그 곳에 서서 같이 박수를 치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원죄도. 이후 청계천을 연인과 동료와 함께 한가로이 거닐던 많은 이들의 원죄도. 그 위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며 촛불을 들던 수많은 시민들의 원죄도...그러니까 우리가 다시 난쏘공을 세상으로 불러들인 곳이 그곳이다...
그리고 나의 원죄도 바로 그곳에 있다. 거기서 모든 게 시작됐다. 아마 그 매듭을 풀지 않는 이상 우리는 결코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그래서 애초에 '역사'가 될 자격조차 박탈당한 이들의 절규를, 그 한 맺힌 울부짖음을 청량하게 흐르는 청계천 물소리나, 깡하고 경쾌하게 울리는 배팅소리로 잘 못 듣는다면 우리는 용산참사와 같은 일을 보고 또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맘 편히 드라마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이명박 대통령은 그 원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세계적 풍물 시장'에서 많은 이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아래 주소는 철거민중 한분이 올린글..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26&articleId=28417&hisBbsId=best&pageIndex=1&sortKey=readCount&limitDate=-30&lastLimitDate
마음이 너무 무겁고..뭔가에 짖눌린 답답한...
내가 행동하여 경험하고 느낀 것을 믿는 것이
좀더 본질쪽에 가까운 것임에 분명하겠죠.
본질을 숨기기 위해 좋게 보여지길 원하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