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노무현의 죽음, 그래서 할 일은… "투표 합시다."
- [충]나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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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미]노무현의 죽음, 그래서 할 일은…
박연미기자 change@inews24.com
코 끝이 싸하게 춥던 2003년 2월25일.
휴가를 냈다. 손꼽히는 보수 신문에서 일하던 시절이다. 취재진 아닌 새천년민주당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1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인터넷 자봉단 모집에서 당당히 선발된 내 임무는 폼나게 말해 내빈 안내, 실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는 일이었다.
국회 앞마당에서 한 시간, 두 시간….
한기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바람따라 간이 화장실의 얄궂은 냄새가 밀려왔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거기 모든 비주류의 희망,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었으니까.
살며 처음 정치후원금을 내 본 대선이었다. "원칙을 바로세워 신뢰 사회를 만듭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갑시다."(노 전 대통령 취임사 中)
대통령의 목소리는 사이다처럼 청량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격언이 진실임을 깨닫게 한 산 증인, 그를 위해 추위에 떤 날, 기뻤다.
그러나 정치는 동화가 아니었다.
기득 세력은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수 신문들은 파격에 반대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 자신의 특권을 줄이는 데서 시작된 개혁은 보수세력의 목줄을 죄었다.
새 정부는 청춘(靑春) 같았다. 속도와 통증을 조절하는 데 미숙했다. 언론들은 이 젊은 정부의 투박한 국정 운영을 '무능'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직설화법도 끝없이 말거리를 주었다. 콘텐츠가 아니라, 그걸 담은 말이 문제되는 날이 많았다.
이라크 파병 결정, 한미 자유무역협상 개시.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정책 추진에 지지자들은 사분오열했다. 재벌 사돈도, 막강한 집안 배경도, 든든한 학연도 없는 대통령은 헌정 초유의 탄핵 시도에도 방탄조끼 없이 포탄을 맞았다. 그야말로 논쟁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격정은 멀고, 일상은 가까운 법.
노무현의 승리에 울고 웃던 지지자들은 어느새 생활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가에서 벌어지는 지리한 입씨름이 점점 지겨워졌다. '노짱'을 부르짖던 이들은 피로해졌다. 보수 언론들은 "무능한 청류보다 유능한 탁류가 낫다"고 속삭였다.
그 사이 '노무현 놀이'가 시작됐다.
월드컵 대표팀이 가나에 완패했다는 기사에도,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결혼생활에 실패했다는 외신 아래에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맥락없는 댓글이 달렸다. 민심의 향배가 읽혔다.
2006년 5.31 지방 선거 이후 크게 유행한 이 놀이는 결국 세계 최대의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 등재되고 만다. 영어, 중국어 등 세계 10개국 언어로 개설돼 매일 수백만명이 방문하는 인터넷 UCC백과사전에 대한민국의 첫 인터넷 대통령 '노무현'의 이름이 조롱거리로 남았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었다.
17대 대선은 노련함과 부가가치 창출 계획이 승리한 선거였다. 국민들은 아마추어리즘에 지쳐있었다.
노회함을 산 대가는 컸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거나 인터넷에서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다간 철창 신세를 지는 세상이 되었다. 입은 있으되 말 할 수 없는 조용한 세상. 국민들은 새 정권이 들어선 이 시대를 '신(新) 공안정국', '제2의 유신시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2009년 5월 23일 전직 대통령이 투신했다.
푸근한 시골 할아버지로 살던, 그러나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인터넷 정객 노 전 대통령은 고향 마을 단단한 바위에 몸을 던져 생을 부러뜨렸다. 구속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재임 중 60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다.
전직 대통령이 기업인에게 거액의 돈을 받은 건 분명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영부인이 건네 받았다는 자금은 대부분 제 앞가림을 하고도 남을 나이의 자녀들에게 전해졌다. 답답한 노릇이다. 액수를 떠나 대통령이 재임 중 알았다면 법적 처벌을, 몰랐다면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과정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대학살을 벌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도덕성을 생명으로 삼던 그의 평생이 무너졌다.
상식적인 일이었을까. 노 전 대통령의 혐의가 확정되었다 치자. 죄의 경중을 묻는다. 그들 셋, 과연 한 줄에 세울만 한가.
영국의 유력 일간 더 타임스는 노무현의 죽음을 일러 그랬다. "부패한 사람들은 부패와 함께 살아갈 수 있지만 정직한 개혁 운동가였던 노무현은 그러지 못했다"고.
다시 묻는다.
검찰의 수사는 불편부당했는가, 그들이 자신하던 정황 증거들은 전직 대통령을 검찰로 불러들일 만큼 믿을만 한 것이었는가, 검찰과 언론은 과연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가, 그걸 보는 국민들은 이성을 차갑게 식혀 단단히 붙들고 있었는가. 모두가 모두에게 면목없어 마땅한 때다.
이제 하루 뒤면 영결식.
존경 아니라 사랑을 받았던 대통령 노무현과 내일이면 안녕이다.
그가 숨을 거둔 지 이제 엿새, 국민들의 염원에도 서울광장은 끝내 '명박산성'에(이명박 정부가 시위나 군중 결집을 막기 위해 전경차로 특정 지역을 가로막은 모습을 빗댄 말. 2008년 6월 위키피디아에 등재되었다 삭제됨) 가로막혀 열리지 않았다.
해묵은 사진까지 꺼내들고 고인과의 인연을 상기하던 여당 원내대표는 식지 않는 추모열기에 "국민들이 북핵 위기감이 없는 것 같다"며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 안간힘쓰고 있지만, 여당과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추락 중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대선과 총선 때 나들이 가거나 늦잠을 잔 젊은이들은, 참으로 아프게 '투표의 경제학'을 되뇌는 중이다. 거대한 노무현 추모게시판이 돼버린 유력 포털사이트에선 "다음부턴 꼭 투표합시다"가 백 마디 성토를 대신하는 인사말이 돼버렸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ID '잎싹'은 말했다. "투표를 해야하는 날에는 꼭 빠지지 않고 투표를 하고… 그래서 오늘을 기억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투표를 꼭 하고, 제대로 하고, 상식적인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희경을 베낀다.
화장실 안내마저 자랑스럽게 만들었던, 와장창 무너져내릴 땐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이라도 나누고 싶었던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참 묘하다.
살아서는 노무현이 그냥 노무현이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마지막엔 제가 연주한 상록수 기타연주를 넣었습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서도.. -_-;)
박연미기자 change@inews24.com
코 끝이 싸하게 춥던 2003년 2월25일.
휴가를 냈다. 손꼽히는 보수 신문에서 일하던 시절이다. 취재진 아닌 새천년민주당 자원봉사자 신분으로 16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했다.
인터넷 자봉단 모집에서 당당히 선발된 내 임무는 폼나게 말해 내빈 안내, 실은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주는 일이었다.
국회 앞마당에서 한 시간, 두 시간….
한기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바람따라 간이 화장실의 얄궂은 냄새가 밀려왔다. 그렇지만 괜찮았다. 거기 모든 비주류의 희망,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있었으니까.
살며 처음 정치후원금을 내 본 대선이었다. "원칙을 바로세워 신뢰 사회를 만듭시다.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갑시다."(노 전 대통령 취임사 中)
대통령의 목소리는 사이다처럼 청량했다. '사필귀정(事必歸正)'. 격언이 진실임을 깨닫게 한 산 증인, 그를 위해 추위에 떤 날, 기뻤다.
그러나 정치는 동화가 아니었다.
기득 세력은 새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보수 신문들은 파격에 반대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대통령 자신의 특권을 줄이는 데서 시작된 개혁은 보수세력의 목줄을 죄었다.
새 정부는 청춘(靑春) 같았다. 속도와 통증을 조절하는 데 미숙했다. 언론들은 이 젊은 정부의 투박한 국정 운영을 '무능'이라고 했다. 노 전 대통령의 직설화법도 끝없이 말거리를 주었다. 콘텐츠가 아니라, 그걸 담은 말이 문제되는 날이 많았다.
이라크 파병 결정, 한미 자유무역협상 개시.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정책 추진에 지지자들은 사분오열했다. 재벌 사돈도, 막강한 집안 배경도, 든든한 학연도 없는 대통령은 헌정 초유의 탄핵 시도에도 방탄조끼 없이 포탄을 맞았다. 그야말로 논쟁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격정은 멀고, 일상은 가까운 법.
노무현의 승리에 울고 웃던 지지자들은 어느새 생활인으로 돌아가 있었다. 정가에서 벌어지는 지리한 입씨름이 점점 지겨워졌다. '노짱'을 부르짖던 이들은 피로해졌다. 보수 언론들은 "무능한 청류보다 유능한 탁류가 낫다"고 속삭였다.
그 사이 '노무현 놀이'가 시작됐다.
월드컵 대표팀이 가나에 완패했다는 기사에도, 유명 할리우드 배우가 결혼생활에 실패했다는 외신 아래에도 "이게 다 노무현 때문"이라는 맥락없는 댓글이 달렸다. 민심의 향배가 읽혔다.
2006년 5.31 지방 선거 이후 크게 유행한 이 놀이는 결국 세계 최대의 온라인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 등재되고 만다. 영어, 중국어 등 세계 10개국 언어로 개설돼 매일 수백만명이 방문하는 인터넷 UCC백과사전에 대한민국의 첫 인터넷 대통령 '노무현'의 이름이 조롱거리로 남았다.
그리고 정권이 바뀌었다.
17대 대선은 노련함과 부가가치 창출 계획이 승리한 선거였다. 국민들은 아마추어리즘에 지쳐있었다.
노회함을 산 대가는 컸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가거나 인터넷에서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다간 철창 신세를 지는 세상이 되었다. 입은 있으되 말 할 수 없는 조용한 세상. 국민들은 새 정권이 들어선 이 시대를 '신(新) 공안정국', '제2의 유신시대'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고, 2009년 5월 23일 전직 대통령이 투신했다.
푸근한 시골 할아버지로 살던, 그러나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인터넷 정객 노 전 대통령은 고향 마을 단단한 바위에 몸을 던져 생을 부러뜨렸다. 구속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재임 중 600만달러를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다.
전직 대통령이 기업인에게 거액의 돈을 받은 건 분명 석연치 않은 일이었다. 영부인이 건네 받았다는 자금은 대부분 제 앞가림을 하고도 남을 나이의 자녀들에게 전해졌다. 답답한 노릇이다. 액수를 떠나 대통령이 재임 중 알았다면 법적 처벌을, 몰랐다면 도덕적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문제는 과정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 광주대학살을 벌인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이어 사상 세 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도덕성을 생명으로 삼던 그의 평생이 무너졌다.
상식적인 일이었을까. 노 전 대통령의 혐의가 확정되었다 치자. 죄의 경중을 묻는다. 그들 셋, 과연 한 줄에 세울만 한가.
영국의 유력 일간 더 타임스는 노무현의 죽음을 일러 그랬다. "부패한 사람들은 부패와 함께 살아갈 수 있지만 정직한 개혁 운동가였던 노무현은 그러지 못했다"고.
다시 묻는다.
검찰의 수사는 불편부당했는가, 그들이 자신하던 정황 증거들은 전직 대통령을 검찰로 불러들일 만큼 믿을만 한 것이었는가, 검찰과 언론은 과연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킬 의지가 있었는가, 그걸 보는 국민들은 이성을 차갑게 식혀 단단히 붙들고 있었는가. 모두가 모두에게 면목없어 마땅한 때다.
이제 하루 뒤면 영결식.
존경 아니라 사랑을 받았던 대통령 노무현과 내일이면 안녕이다.
그가 숨을 거둔 지 이제 엿새, 국민들의 염원에도 서울광장은 끝내 '명박산성'에(이명박 정부가 시위나 군중 결집을 막기 위해 전경차로 특정 지역을 가로막은 모습을 빗댄 말. 2008년 6월 위키피디아에 등재되었다 삭제됨) 가로막혀 열리지 않았다.
해묵은 사진까지 꺼내들고 고인과의 인연을 상기하던 여당 원내대표는 식지 않는 추모열기에 "국민들이 북핵 위기감이 없는 것 같다"며 이내 속내를 드러냈다. 안간힘쓰고 있지만, 여당과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추락 중이다.
그리고 국민들은, 대선과 총선 때 나들이 가거나 늦잠을 잔 젊은이들은, 참으로 아프게 '투표의 경제학'을 되뇌는 중이다. 거대한 노무현 추모게시판이 돼버린 유력 포털사이트에선 "다음부턴 꼭 투표합시다"가 백 마디 성토를 대신하는 인사말이 돼버렸다.
포털사이트 다음에서 ID '잎싹'은 말했다. "투표를 해야하는 날에는 꼭 빠지지 않고 투표를 하고… 그래서 오늘을 기억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투표를 꼭 하고, 제대로 하고, 상식적인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노희경을 베낀다.
화장실 안내마저 자랑스럽게 만들었던, 와장창 무너져내릴 땐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이라도 나누고 싶었던 노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참 묘하다.
살아서는 노무현이 그냥 노무현이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 마지막엔 제가 연주한 상록수 기타연주를 넣었습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서도..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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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는 노무현이 그냥 노무현이더니, 그 이상은 아니더니,
돌아가시고 나니 그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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