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이경희] '42.195 그레이트 손'.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 획득 70주년(2006년)을 앞두고 그 주인공인 고 손기정선생에게 바치는 헌정 앨범의 제목이다. 고인에게 바치는 헌정곡 외에 밀양 아리랑.옹헤야.강강술래.진도 아리랑.나그네 설움 등을 재즈로 바꾼 작품이 담겨 있다. 그런데 앨범을 만든 주인공은 한국인이 아니라 독일의 5인조 재즈 앙상블 살타첼로다. 독일 뮤지션이 한국의 영웅을 기리는 음악을 만든 까닭이 뭘까. 앨범에 실린 노래의 작곡과 편곡을 맡은 살타첼로의 리더 페터 쉰들러에게 e-메일로 물었다.

"42.195km를 달려 금메달을 따고도 조국을 위해 뛰지 못한 안타까움에 기뻐할 수 없었다니…. 우연히 알게 된 이 믿기 어려운 이야기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뛸 수밖에 없었던 고인의 이야기를 그는 수 년 전 우연히 접하게 됐다. 슈테판 뮐러라는 독일인의 글을 통해서였다. 이 글은 금메달을 따고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고인의 이야기,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딴 뒤 손 선생과 끌어안는 장면 등을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글은 2001년 한글로 번역돼 인터넷에 올라 화제가 됐고 최근 네티즌 사이에 다시 퍼지고 있다.

▶ 살타첼로 "그레이트 손" 재킷 페터 쉰들러는 이후 도서관을 뒤져가며 한국 역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고인을 위한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저도 하프 마라톤을 합니다. 그래서 마라톤이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습니다. 그 역동적이고 극적인 과정은 음악과 닮았지요. 그러니 작곡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타첼로는 원래 재즈에 라틴 음악을 접목시켰던 그룹. 그러나 10여 년 전 우연히 한국 전통음악을 접한 뒤 장르를 바꿨다. 지금은 한국 전통음악을 바탕으로 한 창작으로 유럽에서 주목받고 있다.

"한국 전통음악은 유럽인에겐 낯선 멜로디와 도전적인 리듬을 갖고 있습니다. 그걸 변형하는 작업은 아주 매력적이지요. 강강술래를 연주할 때면 독일 청중은 한국 곡이 들어 있는 그 음반을 사고 싶어합니다. 굉장한 일 아닌가요?"

재즈 앙상블 살타첼로는 한국에서 김영임 명창, 가야금 그룹 사계, 해금 연주자 강은일 등과 협연했다. 그 인연으로 그들의 음반에는 국악을 접목시킨 음악이 두어 곡씩 들어가곤 했다.

"맛있는 음식을 한번 맛보면 또 먹고 싶어지죠. 좋은 음악도 마찬가집니다. 저는 판소리와 사물놀이, 해금과 가야금이 그냥 좋습니다. 이젠 한국 곡인지 아닌지 따지지도 않습니다. 이미 제 음악 생활의 일부니까요."

쉰들러는 아침에 한국식 국을 끓여먹을 정도로 한국 문화에 푹 빠져 지낸다. '빨리 빨리'를 외치는 한국인의 습성마저 '다이내믹 코리아'란 곡으로 바꿔놓았다. 분단의 경험이 있는 독일인이기에, 그리고 올림픽이 열린 도시가 분단의 상징이던 베를린이었기에 한국에 대한 애정이 더 각별한 것이기도 하다.

"한국인이면서도 일본인으로 기록되어야 했던 아픈 역사를 기록하는 데 기여할 수 있어 영광입니다. 베를린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올림픽이 열렸다면 사정이 달랐을 겁니다.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완벽한 공작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누구도 더 이상 복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멀리 내다보고 용서해야 합니다. 특히나 쓰라린 과거를 안고 있는 독일 국민으로서 한국인들이 미래와 화해하길 청하고 싶습니다."

출처<중앙일보 Joins.com 이경희 기자 dungle@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