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푸른 하늘, 붉은 까치밥-감마을 청도
- [서]오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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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4-11-11 16:48]
샛노란 은행잎에 햇살이 머물며 반짝반짝 빛을 내던 가을날, 농투성이 부부가 감을 딴다. 트랙터가 밭을 갈고, 콤바인이 추수를 하는 세상이지만 아직도 감농사를 짓는 농부들은 대나무 끝에 갈고리와 천 주머니를 달고 감을 딴다. 나무에 위태롭게 올라타서 장대를 들이미는 남편과 낙과를 주워 담는 아낙네…. 농부의 등에는 봄볕보다 따스한 햇살이 내려앉는다. 바지런한 부부의 손놀림에 언덕배기 감나무엔 어느새 까치밥만 남았다. 나뭇가지가 창 끝처럼 날카로운 만추(晩秋)이지만 새파란 하늘에 걸린 붉은 까치밥 하나에 텅 빈 들녘이 평화롭다.
감마을 경북 청도. 산으로 둘러싸여 드넓은 전답은 없지만 까치밥을 매단 감나무가 가로등처럼 밭고랑 곳곳에 흩어져 있다. 감밭에 들어서서 사진기를 꺼내자 초로의 농부는 손사래를 쳤다.
“뭐하러 사진을 찍능교. 몬생긴 얼굴 찍지 말고 은행나무나 찍어가이소. 은행나무 단풍 참 이쁘지요.”
처음엔 카메라 앞에 어색해하던 농부도 곧 무덤덤해졌다. 아마도 사진기를 피할 시간조차 없었을 것이다. 감나무밭 옆 은행나무 아래엔 껍데기가 삭아 말랑말랑해진 은행들이 뒹굴고 있었다. 감수확을 갈무리하느라 은행은 주워담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된서리나 매서운 북풍이 몰아쳐도 감나무는 웬만해서 감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하지만 하루라도 시세가 좋을 때 감을 넘겨야 한다. 지난해에는 감값이 사상 최고였다. 15㎏ 한 상자에 4만원. 태풍 ‘매미’ 때문에 다른 지역 감이 많이 상해 감값이 폭등했다. 청도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태풍피해가 별로 없기 때문에 반사이익을 봤다. 2002년엔 15㎏ 한 상자에 5,000원이었다. 풍년인가 싶었더니 출하량이 많아지자 감값이 폭락했다. 인부 일당이 남자는 6만원, 여자는 4만원. 포장비, 운송비를 빼면 헛농사를 지은 셈이다. 올해는 1만5천원 안팎이다. 하루종일 밭에서 일해도 큰 돈을 만질 수는 없지만 농군 부부는 감농사가 논농사보다 낫다고 했다. 요즘 농촌생활이 그만큼 위태롭고 버거운 모양이다. 숨돌릴 틈도 없는 와중에도 아낙네는 기자에게 단감과 홍시를 한아름 건넸다. 청도감이 옛날부터 맛이 깊은데 선전이나 잘 해달라며….
청도 땅에서 생산되는 감은 1만9천t. 돈으로 치면 2백43억원 정도로 전국 생산량의 20%를 차지한다. 약 7,000농가 중 5,000가구 이상이 감농사를 짓는다. 주민의 70%가 감나무에 의지해 살고 있는 셈이다. 청도 땅에서 곶감 찾기는 힘들다. 수분이 많아 통째로 두면 잘 마르지 않고 쉬 곰팡이가 피어 꽂감 대신 감을 네 조각으로 나눠 말린 감말랭이가 특산품이다. 감말랭이뿐 아니라 감와인, 아이스 홍시, 감식초, 감한과, 감선식도 나온다. 감물로 천연염색을 하는 집도 아홉가구나 된다.
감나무는 어디를 가나 볼 수 있지만 운문사 가는 길이나 청도읍 가는 국도변에 많다. 경산에서 청도로 이어지는 국도변의 감나무는 대추나무, 복숭아나무와 대조를 이룬다. 수확을 끝낸 대추는 이파리 한 장 붙어 있지 않지만 복숭아나무엔 울긋불긋한 단풍이 반쯤 달려 있다. 감잎은 복숭아나무나 단풍나무보다 더 붉은 진홍빛이다.
감잎을 한 장 주워 책갈피에 넣었다. 아득했던 옛날엔 감잎을 곱게 말려두었다가 편지지로 썼단다. 시 한 수를 써서 마음을 전했던 연서였다니 얼마나 낭만적인가. 감잎을 그래서 시엽지(詩葉紙)라고 한다.
운문사 가는 길과 한재 부근의 감나무는 더 예스럽다. 감나무는 고목을 이뤘고, 마을도 30여 년 전 새마을운동 당시 올린 슬레이트 지붕이다. 빈한하지만 외려 정감이 간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팍팍해도 농부들은 감을 다 따지 않고 까치밥으로 남겨뒀다. 서리를 맞을수록 더 붉어지는 까치밥은 정겨웠던 옛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설익은 땡감을 항아리에 익혀두었다가 손자들에게 들이밀던 할머니, 장대 들고 감나무에 올라 탄 손자에게 까치밥을 남겨두라고 타이르던 할아버지…. 하기야 요즘 사람들은 날짐승에게조차 자비를 베풀었던 까치밥의 의미조차 잊고 산 지 오래다.
▲청도감 미스터리-씨가 사라져요
청도감은 홍시의 일종인 반시다. 상주곶감, 진영단감과 함께 청도 반시는 궁중에 진상될 정도로 유명했다. 역사는 얼추 500년이 된다. 명종 때인 1545년 청도 이서면 출신의 박호 선생이 평해 군수로 있다가 귀향하면서 가져온 감나무가 반시의 효시라고 한다. 청도감은 씨가 없다. 다른 지역에서 새 종자를 들여와도 청도에만 오면 씨가 없어진다. 군청 직원들은 수나무도 암나무처럼 감을 맺는다고 했다. 농업기술센터는 미스터리를 밝히기 위해 연구도 많이 했다. 청도군에 있는 감나무가 대부분 암나무이기 때문에 수정을 못하고 씨가 맺히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지만 왜 암나무만 그렇게 많은지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한다.
▲여행길잡이
▶교통
경부고속도로 경산IC로 빠져나오자마자 왼쪽 진량 방면 길로 들어선다. 자인 방면으로 우회전하면 69번 지방도. 갈림길이 나오지만 계속 직진하면 된다. 7㎞쯤 가면 왼쪽에 학교가 보이는 3거리. 여기서 우회전해 919번 지방도를 타고 간다. 다시 200m를 간 다음 동부4거리에서 좌회전하면 ‘운문’ 표지판을 만난다. 계속 달리면 운문호를 거쳐 운문사로 이어지고 직진하면 청도읍 가는 길이다. 대구까지 간 뒤 버스를 타고 청도로 갈 수 있다. 대구 남부정류장에서 청도정류장까지 10~15분 간격으로 버스가 운행한다. 운문사 정류장까지는 40분 간격이다. 청도군청(370-6114), 운문사(372-8800).(지역번호 054)
▶먹거리
운문사 입구에는 주로 잡어 매운탕집이 많다. 청도읍에 있는 원조할매추어탕(371-2349)은 걸쭉한 남도식 추어탕과 달리 맑은 국물에 시래기를 듬뿍 넣어 추어탕을 끓인다. 추어탕만 판다. 3,500원. 운문사 앞에는 후레시힐(371-0700) 등 모텔과 민박집이 있다.
감말랭이는 1㎏에 1만2천~1만5천원. 두산농원(372-2428)에서 판다. 감잎차는 덕촌리 노인회(372-7245)에서 만든다. 1봉에 1만원. 감선식은 대동골식품(371-6688)이 잘한다.
〈글 최병준기자 bj@kyunghyang.com〉
〈사진 정지윤기자 colo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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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엄니는 변비시라 패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