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서울대 김밥할머니 “나 더러 어디로 가라고
- [경]庚寅白虎[063]
- 조회 수 267
- 2007.05.04. 23:21
서울대 김밥할머니 “나 더러 어디로 가라고…” 논란 "
[동아닷컴]
서울대 인문대에서 20년간 김밥을 팔아온 70대 할머니에 대해 학교 측이 영업금지를 결정해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학은 3일 학장단 회의를 열어 안병심(73) 할머니의 김밥 판매를 금지시키기로 결정했다. 무허가 상행위를 허용할 경우 교내에 다른 잡상인들을 불러들일 수 있고, 위생 검증을 받지 않은 음식을 학생들이 먹고 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그러나 할머니와 학생들은 대학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철회를 요구해 마찰이 일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김밥을 먹고 배탈이 났다는 학생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이 나이에 또 어디로 가라는 말인지…. 여기서 오랫동안 장사해왔고 정도 들었는데…. 여긴 내 고향이나 다름없어. 학생들도 다 아들 같고 손주 같고….” 학생들 사이에서 일명 ‘김밥할머니’로 불리는 안 할머니의 하소연이다.
“아무리 좁아도 좋아, 쫓아내지만 않으면…”
3일 낮 12시 40분. 안 할머니를 만나 사연을 들어보기 위해 서울대를 찾았다. 할머니는 인문대 5동 앞 ‘해방터’ 광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반 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다. 한쪽은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 있었고, 한쪽은 ‘해방터 할머니를 지켜주세요’라는 대자보가 붙은 나무 게시판이 가로막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광장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몇몇 학생들이 할머니에게 김밥과 떡, 도넛, 꽈배기 등을 사갔다.
기자도 점심 대신 먹을 도넛과 떡을 샀다. 김밥은 매진이었다. 김밥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한 줄에 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맛도 좋단다. 도넛과 떡은 각각 1,000원이었다. 값이 10년째 그대로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장사가 잘돼야 하루 고작 1만~2만원 정도 남는다.
할머니 곁에 쪼그려 앉아 도넛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깊게 패인 얼굴 주름과 거친 손등, 약간 굽은 허리에 선한 눈매를 지녔다.
“원래는 나무 게시판으로 막아놓은 이곳이 내 자리였어. 여기에 과일상자를 포개놓고 김밥이나 도넛 같은 것을 올려놓고 장사를 했어. 그런데 학교에서 장사를 못하게 이렇게 막아놓은 거야. 하지만 오히려 좋아. 그늘도 만들어주고 하니….”
할머니는 말을 멈추고 웃었다. 그러나 힘없는 웃음 앞에 도사린 현실은 씁쓸했다. 예전의 좌판은 온데 간 데 없고 지금은 스티로폼 박스 하나만 뎅그러니 놓여 있다. 박스 안에는 김밥과 도넛 등이 담겨 있다.
“단속 피하려다 다친 적도 많아”
할머니는 언제 자리를 떠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음식을 조금씩 나눠서 학교에 가져온다고 했다. 다 팔면 먼 길을 걸어가 김밥이랑 도넛을 다시 가지고 온단다.
“학교 관계자들이 나와서 장사하지 말라고 해. 어떨 때는 경찰에 말해서 쫓아내. 지난번에는 경찰들이 와서 좌판을 죄다 차에 싣고 갔어.”
단속은 예전에도 있었다. 할머니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김밥이 든 박스를 목에 이다가 목뼈가 부러진 적도 있다. 겨울에는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단다.
할머니에게 “자리가 너무 비좁지 않냐”고 물었더니 “괜찮아, 좁아도 좋으니 쫓아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대학당국의 입장은 완강했다.
인문대 측은 “할머니의 영업 금지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며 “얼마 전에도 모 종교단체에서 학생들에게 국수를 나눠주는 행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허용해주지 않았다. 위생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학생 보호차원에서 허가해 주지 않았다. 할머니가 파는 음식도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단속을 계속하겠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인문대 학생회장인 최려목(21) 씨는 할머니를 옹호하며 대학의 결정에 반발했다.
“할머니가 장사 공간을 많이 차지해 학교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도 혼자서 꿋꿋하게 사시면서 손자들을 키웠고, 이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고 있다. 싼값에 김밥을 팔고 돈이 없는 학생들에겐 공짜로 주시곤 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학교 측은 할머니께서 파시는 김밥의 위생 상태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
‘해방터’에서 만난 다른 학생도 “학교에 몇 년을 다녔지만 학생들이 할머니께서 파시는 음식을 먹고 배탈 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되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학생들의 의견은 한마디도 묻지 않고 학교 측에서 멋대로 처리하는 행태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랏돈 공짜로 받기보다는 내 손으로 벌어먹고 살고 싶어”
안 할머니의 고향은 전남 해남이다.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70년대 중반 상경했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시위 현장을 누볐다. 최루탄 가스가 터지는 곳곳을 찾아다니며 김밥 등을 팔았다.
연세대, 숭실대 등 서울시내 대학을 전전했다. 그러다 지난 1987년 해방터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학생들이 참 착해. 아이들 보고 싶어서 매일 나오는 거야. 하나같이 다들 아들 같고 손주 같고…. 난 돈 같은 거 몰라. 아이들이 주면 받고 없다고 하면 그냥 주고…. 그래도 학생들이 나중에라도 꼭 갚아.”
할머니에게는 장성한 손녀와 손자가 있다. 이혼한 아들 대신 김밥 행상으로 그들을 키웠다. 손녀는 대학졸업 후 회사에 다니고, 손자는 군복무 중이다. 이번에 할머니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손녀가 “이젠 제발 장사를 그만두라”고 울며 매달렸단다.
손자손녀가 장성한 만큼 할머니도 이제는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을 법한데, 아직은 아니란다.
“동사무소에 영세민 신고하면 나라에서 돈을 줘. 하지만 내 몸이 성한데 왜 달라고 해. 난 내 손으로 벌어먹고 싶어. 그리고 죽으면 영원히 쉴 몸,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지.”
“여긴 내 고향인데 고향을 떠날 수 있나”
오후 1시 30분이 넘어서자 소란스럽던 광장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학생들의 수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흰 박스는 비었다. 할머니는 오후에 팔 김밥을 가지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정을 걸어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왜소했다. 할머니는 길을 걷다가 잠시 멈춰선 뒤 나직하게 읊조렸다.
“여긴 내 고향이야. 정붙이고 산 지 20년이 다 되가는데…. 다 늙은 내가 어디를 가겠어. 학생들이 눈에 밟혀서 못 가지….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할 텐데….”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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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닷컴]
서울대 인문대에서 20년간 김밥을 팔아온 70대 할머니에 대해 학교 측이 영업금지를 결정해 논란이 일고 있다.
대학은 3일 학장단 회의를 열어 안병심(73) 할머니의 김밥 판매를 금지시키기로 결정했다. 무허가 상행위를 허용할 경우 교내에 다른 잡상인들을 불러들일 수 있고, 위생 검증을 받지 않은 음식을 학생들이 먹고 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그러나 할머니와 학생들은 대학의 결정이 부당하다며 철회를 요구해 마찰이 일고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할머니의 김밥을 먹고 배탈이 났다는 학생은 들어보지 못했다”고 했다.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어. 이 나이에 또 어디로 가라는 말인지…. 여기서 오랫동안 장사해왔고 정도 들었는데…. 여긴 내 고향이나 다름없어. 학생들도 다 아들 같고 손주 같고….” 학생들 사이에서 일명 ‘김밥할머니’로 불리는 안 할머니의 하소연이다.
“아무리 좁아도 좋아, 쫓아내지만 않으면…”
3일 낮 12시 40분. 안 할머니를 만나 사연을 들어보기 위해 서울대를 찾았다. 할머니는 인문대 5동 앞 ‘해방터’ 광장 한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반 평도 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다. 한쪽은 나무가 울창하게 솟아 있었고, 한쪽은 ‘해방터 할머니를 지켜주세요’라는 대자보가 붙은 나무 게시판이 가로막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광장은 학생들로 북적였다. 몇몇 학생들이 할머니에게 김밥과 떡, 도넛, 꽈배기 등을 사갔다.
기자도 점심 대신 먹을 도넛과 떡을 샀다. 김밥은 매진이었다. 김밥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한 줄에 5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맛도 좋단다. 도넛과 떡은 각각 1,000원이었다. 값이 10년째 그대로다. 저렴한 가격 때문에 장사가 잘돼야 하루 고작 1만~2만원 정도 남는다.
할머니 곁에 쪼그려 앉아 도넛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할머니는 깊게 패인 얼굴 주름과 거친 손등, 약간 굽은 허리에 선한 눈매를 지녔다.
“원래는 나무 게시판으로 막아놓은 이곳이 내 자리였어. 여기에 과일상자를 포개놓고 김밥이나 도넛 같은 것을 올려놓고 장사를 했어. 그런데 학교에서 장사를 못하게 이렇게 막아놓은 거야. 하지만 오히려 좋아. 그늘도 만들어주고 하니….”
할머니는 말을 멈추고 웃었다. 그러나 힘없는 웃음 앞에 도사린 현실은 씁쓸했다. 예전의 좌판은 온데 간 데 없고 지금은 스티로폼 박스 하나만 뎅그러니 놓여 있다. 박스 안에는 김밥과 도넛 등이 담겨 있다.
“단속 피하려다 다친 적도 많아”
할머니는 언제 자리를 떠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음식을 조금씩 나눠서 학교에 가져온다고 했다. 다 팔면 먼 길을 걸어가 김밥이랑 도넛을 다시 가지고 온단다.
“학교 관계자들이 나와서 장사하지 말라고 해. 어떨 때는 경찰에 말해서 쫓아내. 지난번에는 경찰들이 와서 좌판을 죄다 차에 싣고 갔어.”
단속은 예전에도 있었다. 할머니는 단속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김밥이 든 박스를 목에 이다가 목뼈가 부러진 적도 있다. 겨울에는 빙판길에서 미끄러져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단다.
할머니에게 “자리가 너무 비좁지 않냐”고 물었더니 “괜찮아, 좁아도 좋으니 쫓아내지만 않았으면 좋겠어”라며 긴 한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대학당국의 입장은 완강했다.
인문대 측은 “할머니의 영업 금지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며 “얼마 전에도 모 종교단체에서 학생들에게 국수를 나눠주는 행사를 하겠다고 했는데, 허용해주지 않았다. 위생 상태를 알 수 없기 때문에 학생 보호차원에서 허가해 주지 않았다. 할머니가 파는 음식도 마찬가지다”고 말했다. 단속을 계속하겠다는 말이다.
이에 대해 학생들의 생각은 달랐다.
인문대 학생회장인 최려목(21) 씨는 할머니를 옹호하며 대학의 결정에 반발했다.
“할머니가 장사 공간을 많이 차지해 학교에 지장을 주는 것도 아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데도 혼자서 꿋꿋하게 사시면서 손자들을 키웠고, 이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주고 있다. 싼값에 김밥을 팔고 돈이 없는 학생들에겐 공짜로 주시곤 한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학교 측은 할머니께서 파시는 김밥의 위생 상태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
‘해방터’에서 만난 다른 학생도 “학교에 몇 년을 다녔지만 학생들이 할머니께서 파시는 음식을 먹고 배탈 났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되지도 않은 이유를 대며 학생들의 의견은 한마디도 묻지 않고 학교 측에서 멋대로 처리하는 행태는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랏돈 공짜로 받기보다는 내 손으로 벌어먹고 살고 싶어”
안 할머니의 고향은 전남 해남이다. 민주화 투쟁이 한창이던 70년대 중반 상경했다. 당시 할머니의 나이는 40대 초반이었다. 할머니는 그때부터 시위 현장을 누볐다. 최루탄 가스가 터지는 곳곳을 찾아다니며 김밥 등을 팔았다.
연세대, 숭실대 등 서울시내 대학을 전전했다. 그러다 지난 1987년 해방터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학생들이 참 착해. 아이들 보고 싶어서 매일 나오는 거야. 하나같이 다들 아들 같고 손주 같고…. 난 돈 같은 거 몰라. 아이들이 주면 받고 없다고 하면 그냥 주고…. 그래도 학생들이 나중에라도 꼭 갚아.”
할머니에게는 장성한 손녀와 손자가 있다. 이혼한 아들 대신 김밥 행상으로 그들을 키웠다. 손녀는 대학졸업 후 회사에 다니고, 손자는 군복무 중이다. 이번에 할머니의 소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며 손녀가 “이젠 제발 장사를 그만두라”고 울며 매달렸단다.
손자손녀가 장성한 만큼 할머니도 이제는 편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을 법한데, 아직은 아니란다.
“동사무소에 영세민 신고하면 나라에서 돈을 줘. 하지만 내 몸이 성한데 왜 달라고 해. 난 내 손으로 벌어먹고 싶어. 그리고 죽으면 영원히 쉴 몸,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지.”
“여긴 내 고향인데 고향을 떠날 수 있나”
오후 1시 30분이 넘어서자 소란스럽던 광장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학생들의 수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흰 박스는 비었다. 할머니는 오후에 팔 김밥을 가지러 가야 한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교정을 걸어 나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왜소했다. 할머니는 길을 걷다가 잠시 멈춰선 뒤 나직하게 읊조렸다.
“여긴 내 고향이야. 정붙이고 산 지 20년이 다 되가는데…. 다 늙은 내가 어디를 가겠어. 학생들이 눈에 밟혀서 못 가지…. 죽을 때까지 여기 있어야 할 텐데….”
김승훈 동아닷컴 기자 huni@donga.com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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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힘없는 사람 몰아내기 이전에 자기자신을 반성하고, 좋은 쪽으로 같이 살 수 있는 방안은 금방 나올 수 있을텐데..
해결책을 찾기보다는..그냥 다른사람의 아픈곳을 잘라내버리는 냉정한 사람들이 없어지는 사회가 빨리 와야 할텐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애초에 기자들이 쓴글은 너무 주관적이라...잘 믿지 않는 편이지만,
글로서만 파악해 볼때는..좀 매몰차다는 느낌이 드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