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요즘 제가 재밌게 읽고 있는 책입니다^^
- [서경]JOKER
- 조회 수 140
- 2005.12.27. 17:09
영웅 김영옥...
여러분, 혹시 김영옥 대령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음... 예전에 MBC 스페셜 <영웅, 김영옥 대령> 편을 우연찮게 시청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TV로만 시청할 때는 그냥 막연하게 참.. 대단한 사람이구나. 또, 아... 2차 대전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도 참전했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일대기가 책으로 출간되었다는 정보를 접하게 되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책을 구매하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유럽전선과 한국전쟁 당시 혁혁한 전과를 세우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적 약자인 빈민과 여성·어린이를 위해
사회봉사 활동을 한 재미동포 2세 김영옥 선생의 일대기를 서술한 작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그의 업적을 뒤늦게 알고 훈장을 치하하기도 했었지요.
여러분들은 요즘 어떤 책을 읽고 계시는지요?
좋은 서적이 있다면 함께 정보를 공유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글 올립니다.^^
다음은 김영옥 선생과 관련된 자료입니다.
김영옥씨(81:01년에)는 그 활약상을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가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이라는
영화로 제작해 지난 7월 LA 등지에서 상영한 바 있는 2차대전의 영웅이다.
김영옥 미예비군 대령은 LA에서 태어나 2차대전 당시 미 보병 442연대 100대대 B중대 2소대장으로 참전, 일본계 미국인 사병들로만 구성된 소대를 지휘하며 혁혁한 전과를 올린 것으로 유명하다.
당시 미 전쟁부가 일본계와 한국계가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을 모른채 실수로 일본계 부대에 배치했다고 알리자, 김씨는 "나는 미국인이고, 일본계 미국인 또한 미국인이다. 우리는 같은 이유로 참전했으며, 나는 이 부대에 머무르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엄격한 지휘와 냉철한 판단력으로 이탈리아 볼투르노강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특히 엄폐물이 전혀 없는 개활지에 침투, 독일군을 잡아 정보를 빼내 로마함락에 큰 공을 세웠다.
이같은 공로로 김대령은 미국을 비롯한 프랑스 등지에서 수십 개의 훈장과 표창장을 받았다. 김씨는 2차대전이 끝난 후 한국전에 대령으로 참전 아시아 소수계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전시중 미정규 전투대대를 지휘했다. 전쟁후 2차대전 442연대 100대대 기념재단을 설립했으며, 일본계 참전용사들이 1989년 설립한 교육재단 '고 포 브로크'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하며, 1999년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상정됐을 때 100대대 출신 일본계 지도급 인사들에게 연기명 지지서한을 받았으며, 한미박물관 등 한인단체 창설에도 많은 도움을 줬다.
김영옥씨는 지난해 노근리 사건의 미국측 자문단의 일원으로 노근리를 방문해 현지주민들로부터 증언을 듣기도 했다. 그는 현재 라스베이거스에 살고 있다.
한인 이민 2세로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김씨는 군에 입대한 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무공을 세워 미국 특별무공훈장과 이탈리아 최고무공훈장, 프랑스 십자무공훈장 등을 받았다.
한국전쟁에서는 미군 역사상 전장에서 대대장을 역임한 최초의 유색인 장교라는 기록을 세웠다. 1951년부터 다음해까지 그는 미 육군 7사단 31연대제1대대장으로 전투에 참가한 공로로 은성무공훈장과 동성무공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미 주류사회에서 김씨가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는 것은 이런 전공 때문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김씨가 보여준 휴머니즘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김씨는 일본계로만 구성된 미 보병 442연대 100대대를지휘했다. 당시 일본과 전쟁을 벌이던 미군 지휘부로서는 이 부대의 처리에 골머리를 앓았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한 채 유색인에게 지휘를 떠넘긴 것이었다. 그러나 이 부대는 이탈리아볼투르노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오히려 다른 부대보다 뛰어난 전과를거뒀다.
이 부대에 근무했던 한 일본계 참전 용사는 “부대원 모두 김 대령만 믿고 싸운 결과”라고 술회했다고 전해진다. 이에 대해 김씨는 “내가 한 일이라곤 진주만 침공 이후 미군 내에서 공공연하게 일어나던 일본계에 대한차별에 대해 맞선 것 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금도 김씨는 재미 일본인 사회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 1999년 8월 캘리포니아주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상정했을 때 일본계들은 엄청난 반대 로비를 펼쳤다. 그러나 김씨가 설득에 나서자 로비를 중단하고 ‘위안부 결의안’을 받아 들였다.
또 89년에 재미 일본계 교육재단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재단은 김씨의 일대기를 다룬 ‘잊혀진 용맹(Forgotten Valor)’이라는 제목의영화를 만들어 김씨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조국에서 벌어진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때는 고아원을 세워 전쟁고아들을모아 돌봤다. 김씨는 “당시 군목이었던 샘 닐씨가 버려진 아이들을 데려왔는데 그들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어 고아원을 설립했다”며 “대대 차원에서 담배와 맥주 등 보급품을 시장에 내다 팔고 장병 가족들이 미국에서 보내준 의류로 부모 잃은 아이들을 돌봤다”고 회상했다.
당시 이 부대 장병들은 고아원 운영을 위해 매월 봉급에서 자발적으로 1~2달러를 갹출하고 보급품을 아껴 암시장에 내다 파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 덕분에 고아원은 한국에서 재정이 가장 풍부한 곳중 하나로 자리잡았고 원생은 금세 100여명으로 불어났다. 김씨는 “전쟁이 끝난 뒤 100여명의 원생들은 물론 고아원 관계자들과의 소식이 완전히 끊어졌다”며 “그들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고아원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당시 건물이 사찰이었던 것 같다”며 “사진을 보면 ‘경천애인사(敬天愛人使)’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있었다”고 했다.
대령으로 예편한 뒤에도 김씨는 사회봉사활동을 활발하게 벌였다.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이 그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다.
이 밖에 그는 인종차별철폐운동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가정폭력을 당한 아시아 여성들을 돌보기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립하기도 했다. 이처럼 재미 한인사회에 기여한 공로로 김씨는 한국 정부가 수여하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지난 2000년 김씨는 ‘노근리 양민학살사건 조사단’의 일원으로 도널드그레그 전 주한미대사, 돈 오버도퍼 전 워싱턴포스트 서울특파원 등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김씨는 그 때 일을 가슴 아프게 떠올리며 “한국 전쟁 당시 나는 미군의일원으로 조국을 위해 싸운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보람이었다”며 “그러나 다시는 한국계 미군들이 이런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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