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기자가 기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
- 씨페이코레
- 1553
- 4
[출처]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10/culture07.html
[일부 발췌]
이 글은 프랑스 사람인 빌따알 드 라게리가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의 제4부 ‘현재 한국의 실정’ 중 제5절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중략)
왕궁의 습격 : 10월8일 새벽 4시
10월8일 새벽 4시 보초병들이 경보를 알렸다.
“왕궁이 위험하고 공격받을 것 같다.”
시위대 장교들은 궁의 첫번째 안뜰에 있는 숙사에서 뛰어나왔다. 어떤 이들은 왕에게 이를 전하기 위해 곤녕전으로 달렸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부서로 뛰어갔다. 사람들은 여름정자의 울타리와 연못으로 통하는 문 가까이에 있는 서쪽 성벽 밖에서 일본 군대를 발견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홍계훈 대령은 궁내대신에게 보고하기 위해 말 위에 뛰어 올랐다. 그가 돌아왔을 때 훈련대 병졸들이 일본군 병사 양쪽에 밀집해 있었다. 그는 병졸들에게 흩어져 본 위치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총을 맞고 쓰러졌다. 8발의 총알이 몸을 관통했으며 몸은 일본도에 토막났다. 도대체 왜 이런 급변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곧 왕궁의 문들이 부서졌고 시위대는 총도 쏘지 않고 도망쳤으며, 성벽을 에워싼 훈련대가 사방에서 쳐들어왔다. 약 15명의 일본군 무리가 여름 정자로 통하는 골목길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 앞으로 도망병, 시위병, 시중 등 도합 120여 명이 플라타너스 길가에서 있었다. 질겁한 겁쟁이 오합지졸들은 명령에 따르거나 복종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병사가 총에 장전해 방아쇠를 당기자 그의 동료들은 닥치는 대로 발포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8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잠시 뒤, 일본군의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났으며, 가장 먼저 궁중에 들어온 훈련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 뒤로 민간복을 입은 다수의 일인이 도착했다. 바로 이 순간, 궁 안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은 마지막 경내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소오시’의 민왕비 암살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왕비는 첫번째 경내의 이중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일본 무법자들은 궁내대신 이경직을 찾아 학살했다. 위층에는 여러 궁녀가 피신해 있었다. 암살자들은 우선 왕세자 빈을 붙잡아 머리채를 쥐고 끌고 다니다가 사정없이 때려 상처를 입힌 뒤 마루에서 안뜰로 내던졌다. 위층에 있던 네 궁녀 중 누가 왕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왕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열한 악한들은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궁의 한 시녀가 이 네 궁녀 중 한 사람이 민왕비라고 확인해 주었다. 흡사 식인종처럼 잔인한 일본인들은 왕비를 마구 때려 까무러치게 한 뒤 일본도로 여러 번 쳐서 마침내 숨지게 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민왕비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몇 번의 음모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비가 러시아 공관에 숨어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잔인하고 비열한 자객이 노린 희생자는 그 칼을 피할 수 없었고 일본인들은 원하던 것을 차지했다고 믿게 됐다.
(소오시는 일본말로 장사(壯士). 원래 뜻은 혈기 왕성한 남자인데, 메이지 유신때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자유민권론’을 내걸고 폭력으로라도 목표를 이루겠다는 태도로 정치운동에 가담한 서생들이나 그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후에 일확천금을 꿈꾸고 한국에 건너와 청부 폭력을 일삼은 무뢰한·무법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 - 드 라게리는 이들을 ‘무정부주의자의 일본 변종’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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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화가납니다.
이게 무슨 몇백년이 지난 역사도 아니고 불과 백십여년 안팍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게네들도 이렇게 생각하나봅니다.
"도움받는 것은 도움받는 것이고...독도는 독도다"
초등학생들에게조차 성금을 강요하는 이상한 대한민국....
역사나 제대로 가르치고 그렇게 하던지...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110/culture07.html
[일부 발췌]
이 글은 프랑스 사람인 빌따알 드 라게리가 1898년 파리에서 출간한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의 제4부 ‘현재 한국의 실정’ 중 제5절 ‘한국 왕비의 암살’ 부분을 번역한 것이다.
(중략)
왕궁의 습격 : 10월8일 새벽 4시
10월8일 새벽 4시 보초병들이 경보를 알렸다.
“왕궁이 위험하고 공격받을 것 같다.”
시위대 장교들은 궁의 첫번째 안뜰에 있는 숙사에서 뛰어나왔다. 어떤 이들은 왕에게 이를 전하기 위해 곤녕전으로 달렸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의 부서로 뛰어갔다. 사람들은 여름정자의 울타리와 연못으로 통하는 문 가까이에 있는 서쪽 성벽 밖에서 일본 군대를 발견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홍계훈 대령은 궁내대신에게 보고하기 위해 말 위에 뛰어 올랐다. 그가 돌아왔을 때 훈련대 병졸들이 일본군 병사 양쪽에 밀집해 있었다. 그는 병졸들에게 흩어져 본 위치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총을 맞고 쓰러졌다. 8발의 총알이 몸을 관통했으며 몸은 일본도에 토막났다. 도대체 왜 이런 급변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었다.
곧 왕궁의 문들이 부서졌고 시위대는 총도 쏘지 않고 도망쳤으며, 성벽을 에워싼 훈련대가 사방에서 쳐들어왔다. 약 15명의 일본군 무리가 여름 정자로 통하는 골목길에 갑자기 나타났다. 그들 앞으로 도망병, 시위병, 시중 등 도합 120여 명이 플라타너스 길가에서 있었다. 질겁한 겁쟁이 오합지졸들은 명령에 따르거나 복종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한 병사가 총에 장전해 방아쇠를 당기자 그의 동료들은 닥치는 대로 발포하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8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잠시 뒤, 일본군의 또 다른 무리가 나타났으며, 가장 먼저 궁중에 들어온 훈련대가 그 뒤를 따랐다. 그들 뒤로 민간복을 입은 다수의 일인이 도착했다. 바로 이 순간, 궁 안 가장 깊은 곳에 들어앉은 마지막 경내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일본 ‘소오시’의 민왕비 암살
왕비의 거처에서 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두 번의 총소리가 들렸다.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상황에서 절대적인 진실을 가려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입구 하나를 재빨리 찾아낸 파렴치한 일본 무법자들이 왕비를 찾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왕비의 피신처를 알아내기 위해 궁녀들의 머리채를 쥐고 질질 끌고 다녔다고 한다.
왕비는 첫번째 경내의 이중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일본 무법자들은 궁내대신 이경직을 찾아 학살했다. 위층에는 여러 궁녀가 피신해 있었다. 암살자들은 우선 왕세자 빈을 붙잡아 머리채를 쥐고 끌고 다니다가 사정없이 때려 상처를 입힌 뒤 마루에서 안뜰로 내던졌다. 위층에 있던 네 궁녀 중 누가 왕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왕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비열한 악한들은 이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궁의 한 시녀가 이 네 궁녀 중 한 사람이 민왕비라고 확인해 주었다. 흡사 식인종처럼 잔인한 일본인들은 왕비를 마구 때려 까무러치게 한 뒤 일본도로 여러 번 쳐서 마침내 숨지게 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민왕비가 암살당했다는 소문을 믿지 않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몇 번의 음모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왕비가 러시아 공관에 숨어 있다는 소문도 떠돌았다. 그러나 결국 사람들은 잔인하고 비열한 자객이 노린 희생자는 그 칼을 피할 수 없었고 일본인들은 원하던 것을 차지했다고 믿게 됐다.
(소오시는 일본말로 장사(壯士). 원래 뜻은 혈기 왕성한 남자인데, 메이지 유신때 신정부에 불만을 품은 자들이 ‘자유민권론’을 내걸고 폭력으로라도 목표를 이루겠다는 태도로 정치운동에 가담한 서생들이나 그런 경향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후에 일확천금을 꿈꾸고 한국에 건너와 청부 폭력을 일삼은 무뢰한·무법자를 지칭하는 말로도 쓰였다 - 드 라게리는 이들을 ‘무정부주의자의 일본 변종’이라고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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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화가납니다.
이게 무슨 몇백년이 지난 역사도 아니고 불과 백십여년 안팍에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게네들도 이렇게 생각하나봅니다.
"도움받는 것은 도움받는 것이고...독도는 독도다"
초등학생들에게조차 성금을 강요하는 이상한 대한민국....
역사나 제대로 가르치고 그렇게 하던지...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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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금 참여 안하는 1인...
아침에 글보구 머리가 뜨거워 짐을 느끼고~ 난 대한민국 사람 임을 느꼈읍니다
진짜 이런 거지같은xx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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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마초맨님께서 올려놨던 에조보고서로 좀더 시해장면을 자세히 설명한 내용입니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