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李舜臣)과 무과(武科)
- [경]시나스포[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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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 사랑] 이순신(李舜臣)과 무과(武科)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이순신의 어린 시절이 빈한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지만 그 생애의 보다 큰 수수께끼는 무과 선택의 이유이다. 그의 현조(玄祖) 이변(李邊)은 최고의 학자가 맡는 홍문관 대제학이었고, 그의 증조 이거는 청요직(淸要職) 대간(臺諫)을 역임했다. '기년편고(紀年便攷)'는 조부 이백록(李百祿)을 조광조의 당여(黨與)인 기묘사류(己卯士類)라고 전한다. 이런 문신 집안 자제로서 무과 선택은 드물었다.
이순신은 무과 필기시험인 무경(武經)에서 만점을 받아 문재(文才)를 드러내지만 조선은 문신인 도체찰사(都體察使)·순찰사(巡察使)가 무신을 지휘하는 나라였다. 이분(李芬)이 쓴 '이충무공행록(行錄)'은 '어려서 반드시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는데, 여러 아이들이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들을 따라서 유학(儒學)을 공부했는데, 그 길로 성공할 수 있었으나 매번 붓을 던지고 싶어했다'고 전한다. 같은 기록은 22세 되던 명종 21년(1566) 겨울 '처음으로 무예를 배웠다'고 말한다. 22세 때 무과로 전과했다는 뜻이다.
승지 최유해(崔有海)가 쓴 '이충무공행장(行狀)'도 '형들을 따라 시와 글을 배웠으나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그만두고 무예를 닦기 시작했다'면서 무과 급제 후 성묘 갔을 때 여러 하인들이 묘 앞의 쓰러진 석인(石人)을 세우지 못하자 혼자서 일으켜 세웠다는 일화를 적고 있다. 대제학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은 '글을 읽으면 큰 뜻을 통달했으나 문자만 새기는 글 공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 무예에 종사했다'고 전한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죽이려는 선조에게 "한동네 사람이어서 어려서부터 잘 아는데…… 평일에 대장(大將)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라고 변호했다. 원래 무관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무과 응시는 호무(好武) 성향 때문이라는 기록들인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한산도 승첩의 영향을 적은 후 '이 모든 일이 이순신이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이긴 공이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한 지사(志士)가 소신에 따라 한 급 낮은 무과를 선택한 것이 조선을 살렸던 것이다.
이덕일·역사평론가 newhis19@hanmail.net
이순신의 어린 시절이 빈한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지만 그 생애의 보다 큰 수수께끼는 무과 선택의 이유이다. 그의 현조(玄祖) 이변(李邊)은 최고의 학자가 맡는 홍문관 대제학이었고, 그의 증조 이거는 청요직(淸要職) 대간(臺諫)을 역임했다. '기년편고(紀年便攷)'는 조부 이백록(李百祿)을 조광조의 당여(黨與)인 기묘사류(己卯士類)라고 전한다. 이런 문신 집안 자제로서 무과 선택은 드물었다.
이순신은 무과 필기시험인 무경(武經)에서 만점을 받아 문재(文才)를 드러내지만 조선은 문신인 도체찰사(都體察使)·순찰사(巡察使)가 무신을 지휘하는 나라였다. 이분(李芬)이 쓴 '이충무공행록(行錄)'은 '어려서 반드시 전쟁놀이를 하며 놀았는데, 여러 아이들이 공을 장수로 떠받들었다. 처음에 두 형들을 따라서 유학(儒學)을 공부했는데, 그 길로 성공할 수 있었으나 매번 붓을 던지고 싶어했다'고 전한다. 같은 기록은 22세 되던 명종 21년(1566) 겨울 '처음으로 무예를 배웠다'고 말한다. 22세 때 무과로 전과했다는 뜻이다.
승지 최유해(崔有海)가 쓴 '이충무공행장(行狀)'도 '형들을 따라 시와 글을 배웠으나 탐탁하게 여기지 않아 그만두고 무예를 닦기 시작했다'면서 무과 급제 후 성묘 갔을 때 여러 하인들이 묘 앞의 쓰러진 석인(石人)을 세우지 못하자 혼자서 일으켜 세웠다는 일화를 적고 있다. 대제학 이식(李植)이 쓴 '시장(諡狀)'은 '글을 읽으면 큰 뜻을 통달했으나 문자만 새기는 글 공부는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 마침내 무예에 종사했다'고 전한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죽이려는 선조에게 "한동네 사람이어서 어려서부터 잘 아는데…… 평일에 대장(大將)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라고 변호했다. 원래 무관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이다. 무과 응시는 호무(好武) 성향 때문이라는 기록들인데,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한산도 승첩의 영향을 적은 후 '이 모든 일이 이순신이 단 한 번의 싸움에서 이긴 공이니,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라고 평가했다. 한 지사(志士)가 소신에 따라 한 급 낮은 무과를 선택한 것이 조선을 살렸던 것이다.